에세이 한 편

이혜선 수필집 『아버지의 교육법』, 「아이의 선생님」

검지 정숙자 2024. 6. 19. 01:24

<에세이 한 편>

 

    아이의 선생님

 

     이혜선

 

 

  갑자기 쏟아지는 빗소리에 놀라 우산을 들고 나섰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된 것이다. 집에 있는 날만이라도 좋은 엄마  사실은 평균치도 안 되는 기본이지만  가 되기 위하여 읽던 책을 덮어놓고 상큼한 비의 감촉을 느끼며 빗속을 나섰다.

  모처럼 마중나온 엄마의 손을 잡고 눈을 빛내는 아이와 함께 교문을 나서서 건널목을 지나오다가 가슴이 뭉클하여 멈춰섰다. 건널목을 막 건너서 아파트로 가는 길 앞에 2학년쯤 되는 아이들이 줄지어 서있고 선생님이 그 앞에 서서 한 명씩 잘 가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자기 차례가 더디 와서 불만이라는 듯이 다투어 선생님 손아래에 머리통을 디밀어 넣는 것이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기대에 차서 설레고 있는지, 그리고 선생님께 머리를 쓰다듬기고 나오는 아이의 발걸음이 얼마나 기쁨에 넘치고 자랑스러워 보이는지······

  나는 그곳에 계신 선생님이 새삼 거인처럼 느껴지고 위대하다 못해 절대적인 존재처럼 느껴져서 한참을 멈춰서서 그 흐뭇한 광경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선생님의 가르침에 의해 영혼의 눈을 뜨지 않고 자라난 사람은 현대사회에 아마 없으리라.

  초, 중고, 대학 모두 중요하지 않은 시절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교육의 주체인 선생님에 의해 가장 크게 영향받는 시절이 초등학교 시절일 것이다.

  두뇌가 개발되고 인성이 형성되고 감각이 일깨워지고 사회성을 배우고, 그리하여 처음으로 자아에 눈뜨고 자아를 처음으로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게 되는 시기  이 시기에 들었던, 선생님의 앞길을 인도해주는 말씀 한마디, 칭찬 한마디는 그 아이의 평생의 길잡이가 되어 자신감을 갖게 하고, 성격을 형성해 자기의 길을 찾아가게 하는 나침반이 되고, 더러 안일에 빠지고 싶을 때의 채찍이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무심코 던진 선생님의 비난하는 말 한마디, 합당하지 못한 꾸중이나 눈흘김, 또는 칭찬하고 발굴해 주어야 할 재주나 적성 앞에서의 무관심은 아이의 가슴에 얼마나 큰 가시가 되어 박히게 되는가. 그리하여 그를 용기 없는 사람이 되게 하고, 열등의식에 싸여 평생토록 자신감도 자존감도 없이 기를 못 펴고 사는 사람이 되게 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은 신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선생님은 너무나 옳고 바르고, 다 아시고 절대적인 존재여서, 식사도 안 하고 화장실도 안 가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너무나 겉똑똑이라 선생님 존경하는 마음이 없다고 우리는 흔히 생각해 왔다. 알고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날 선생님의 조그맣고 하얀 손아래에 커다란 머리통을 디밀어 넣고 기쁨과 기대로 빛나던 아이들의 눈빛을 상기하면, 가르친다고 하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분들이 얼마나 큰 능력을 가진 절대자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은 속박으로부터 천분天分을 이끌어 내어 본래 모습대로 자라나도록 키워 주는 작업이라 한다. 마치도 갖가지 다른 곡식을 땅에 심고 가꾸어서 쌀은 쌀대로 콩은 콩대로 각기의 맛과 영양을 가진 큰 열매가 열리도록 하고, 열매채소에는 열매가, 뿌리채소에는 뿌리가 많이 달리도록 하고, 고추는 맵게, 포도는 달고 시게 각기의 특성이 더 잘 나타나도록 북을 돋우는 겸손한 농부와 같은 것이 교육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이들이 각기 가지고 있는 천분과 타고난 적성을 발견하여 길러주고, 자기에게 가장 알맞게 어울리는 자리에 가서 꼭 필요한 존재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타인과 더불어 함께 사는 원만한 성격이 형성되도록 날마다 적당한 양의 물과 거름을 주는 농부로서의 두려운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들에 있는 나무나 풀이 각기 잎이 다르고, 키가 다르고, 꽃이 다르고, 열매가 다르듯이 우리 아이들도 제각기 모양과 성격과 천분과 적성이 다르다.

  손재주가 있는 아이, 봉사 정신이 있는 아이, 계산력이 있는 아이, 느리지만 너그러운 아이, 재빠르고 이기적인 아이 , 정에 굶주린 아이, 과보호 받는 아이, 체력이 약한 아이, 신체장애가 있는 아이, 총명하지만 고지식한 아이······ 아이들의 이런 여러 가지 특성을 기르고, 고치고, 바로잡아주기 위해 오늘도 얼마나 많은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더불어 땀흘리고 울고 웃고 연구하고 고민하고 있을까.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한때 한순간마다 두렵고 소중하지 않은 때가 없지만, 잡무에 쫓겨서, 수업 진도에 쫓겨서 어떤 날은 50명의 아이들과 말 한마디씩은커녕 눈도 한번 맞추지 못하고 일과가 끝나고 만다."고 지난 학기말에 만났던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안타까워하셨다. 그러면서도 나날의 일상에 쫓겨서 그러한 생각도 잠시 잠깐 뿐 그냥 타성에 밀려 무심히 지내게 된다고도 하셨다.

  좀 더 자유로운 교육환경 속에서 적정수의 학생들에게 고루 관심을 쏟으며 학생의 장래와, 나라와 인류의 장래가 연결되는 원활한 교육환경이 마련되는 날이 언제면 우리에게 올 수 있을까. 교사에게 자부심과 사명감과 교육의욕을 북돋워주고, 새로운 동기부여가 되고, 새로운 지식 습득이 가능하도록 재교육과 연수의 기회가 자주 주어지는, 교육투자가 충분히 이루어지는 사회가 언제면 실현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이 신바람 나게 학교에 다니고, 제각기의 천분이 충분히 길러져서 함께 어우러져 살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한 사회가 될까.

  학생들을 다 돌려보낸 빈 교실에서 혼자 책걸상 정리를 하고, 물걸래질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의 아이의 담임선생님 모습이 눈물겹게 떠오른다. (p. 12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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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선 수필집 『아버지의 교육법』 에서/ 2022. 5. 25. <시문학사> 펴냄

이혜선/ 경남 함안 출생, 1981년 월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흘린 술이 반이다』『운문호일雲門好日『새소리 택배』 『神 한 마리』『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 『새소리 택배』『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神 한 마리영역시집『New Sprouts You』(공저)저서『문학과 꿈의 변용』『이혜선의 시가 있는 저녁』『이혜선의 명시산책』, <진단시> <남북시> <유유> <향가시회>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