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이혜선 수필집 『아버지의 교육법』, 「아버지의 교육법」

검지 정숙자 2024. 6. 18. 02:21

<에세이 한 편>

 

    아버지의 교육법

 

    이혜선

 

 

   교육열 높고 진보적인 시골 선비

  아버지는 종손으로 태어나서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의 무거운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 평생동안 선산을 떠나지 못하고, 청운의 뜻을 펴지 못하신 채 고향이라는 늪 속에 엎드려 있어야 하는 이무기이셨다.

  함안 군청으로, 마산 시청으로 공무원이 되어 떠나 있던 것도 잠깐이고,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옥열리 무근절의 대대로 내려오는 선영과 집이 안 잊혀 그예 돌아와 파묻히고 마셨다.

  통 말씀을 안 하셨으니, 일제 식민지 아래서의 공무원 생활이, 굽힐 줄 모르고 아부를 모르는 성격에 맞지 않은 것도 한 이유였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서당에서 익힌 한학漢學과 신학문이 조화되어, 고루한 유교적 가풍 속에서도 젊은이들의 진보적인 사고를 이해하려고 언제나 노력하셨다.

  그래서 교육열 또한 높으셨다.

  유난히 보수적이고 양반 체모를 차리는 집안인지라 여자는 바깥에 내돌리는 게 아니라는 조부의 엄명으로 큰언니 또래의 고모는 초등학교에도 못 가던 시절이었다. 그런 부친의 엄명을 어기고 아버지는 큰딸을 학교에 보내고, 우리 면에 중학교가 없어서 마산까지 유학을 보내셨다. 그래서 큰언니는 온 면내에 하나뿐인 여학생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내 어릴 적의 기억으로 아버지는 엄하면서도 자상하셨다.

  어린 우리들과 함께 바깥마당에서 숨바꼭질하고 안마당에서 공차기도 하면서 친구가 되어 주시고, 달밤이면 시원한 대청마루에서 '합죽놀이'를 하고, 집게발가락을 세워 간질이기 놀이를 하다가 꼬집기를 해서 싫다는 우리 남매들을 끝내 울려 놓기도 하셨다. (엄마가 질겁하고 싫어하셨지만)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신문지를 접어서 뒤에서 안아서 팔을 붙잡고 붓글씨를 가르쳐 주고, 후에 내가 국문학과에 입학하자 모처럼 귀향하는 방학이 짧고 아쉽다는 듯 딸을 붙잡고 앉아 한시를 가르쳐주셨다.

  지금 같으면 예사롭고 단순한 이런 일들이라도 50~60년 전 보수적인 경상도 지방의 시골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일 뿐더러 행여 남들이 보게 되면 크게 흠잡힐 일이었다. 그만큼 뚜렷한 교육철학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p. 79-81)

 

    자기 회초리 스스로 만들게 하는 훈계

  아버지는 이처럼 친구 같은 반면, 한편으로는 엄하고 철저해서 우리들 잘못을 한 번도 그냥 넘기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을 다스리는 독특한 방법을 갖고 계셨다.

  우리집은 아주 산골짜기, 사방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동네에 있었다. 기차는 아예 구경도 못하고, 버스를 타려면 산고개를 넘어가야 했다. 그때 지방에서는 양반은 산골마을에 대대로 뿌리내려 살고, 등 너머 벌판에는 오며가며 뜨내기들이 살아서, 어른들이 그들을 비하해서 '벌놈'이라고 하던 소리를 들었다.

  우리집 뒤로는 커다란 대밭이 있고. 대밭과 텃밭까지 둘러싸는 탱자 울타리 안에 몇 그루 감나무와 배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오얏나무 등, 제사에 필요한 과실나무가 갖추어 늘어서 있었다. 화단에는 옥매화 붓꽃 함박꽃 접시꽃 장미를 비롯하여 갖가지 꽃들이 사철을 두고 다투어 피어났다. 어린 시절 나는 우리집이 세상의 어떤 궁전보다 아름다운 자연의 궁전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왕복 이십 리 산길을 힘들다는 생각 없이 잘 걸어다녔다. 이때의 아름답고 풍요한 자연환경이 지금까지도 내 정서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집 뒤란 대나무밭과 안채 사이에 나무를 쌓아놓는 나무마당이 있었는데 거기엔 큰 나무둥치, 장작, 조그만 실가지, 대나무까치 등이 골고루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잘못을 그때그때 지적하다가, 3~4차례 고쳐지지 않고 계속 쌓이면 어느 날 회초리를 해 오라고 호령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이 매맞을 회초리 만들러 나무마당으로 가지만 이것저것 만져보기만 하고 막상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막막하고 아득해져 쩔쩔매게 된다. 

  큰 걸 만들어 가면 너무 아플 것이요, 그렇다고 너무 작은 걸 해 가자니 양심에 꺼려지고, 무엇보다도 작은 가지는 대나무 가지밖에 없는데 이건 아무리 약한 가지라도 휘청휘청 살에 감겨 휘어지면서 오히려 딴 것보다 더 아프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훌쩍훌쩍 울면서 자기가 맞을 회초리를 자기 손으로 고르고 있는 동안 스스로의 잘못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깊이 뉘우쳐 후회하게 되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는 새로운 결심까지 하게 되는데, 이쯤 되면 그 회초리로 종아리 맞는 것은 별 문제가 안 되고 이미 교육적 효과는 충분히 거두고 난 후인 것이다.

  어린 마음에 일종의 실존적 결단實存的 決斷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짧은 순간이 얼마나 힘겹고 길게 느껴지던지 자기 매맞을 회초리를 자기 손으로 해 오라는 아버지의 분부를 그때는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그냥 때려준다면 원망하고 앙탈이라도 부릴 수 있을 텐테······ (p. 81-82)

 

   자기의 가능성을 스스로 믿게 하는 자기 암시

  나는 지금도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어릴 적엔 퍽 고집 세고 직선적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한 번 울면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하루 종일을 꼬박 울었다. 사실은 울려고 해서 울었다기보다 누가 달래주는 기회를 어쩌다 놓치고 나면 울음을 그치고 싶어도 부끄럽고 멋쩍어서 그칠 수가 없고, 누가 야단치면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게 야속하고 서러워서 더 울었다. 어른들 눈에는 그것이 고집으로 보였을 수밖에 없다.

  야단쳐도 안 되고 달래어도 안 되는 어린 고집불통. 참을성 없고, 노력도 안 하고 직선적으로 파르르 불타는 성격, 그런데도 남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 하는 부끄럼쟁이······

  그런 딸을 아버지는 틈만 있으면 앞에 앉혀놓고 타이르셨다.

  "너는 머리가 총명하니까 네 성격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총명한 사람은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기 자신을 조절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어려운 일, 참아야 할 일도 많고 네가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많은 법이다. 공부만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원만하고 너그럽고 남을 이해할 줄 아는 가슴을 가진 사람, 이 사회에 도움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타고난 성격을 자기 힘으로 고칠 수 있다는 말씀이 처음엔 불가능한 것으로 들렸지만, 10년 20년을 두고 성장과정을 통틀어 한결같이 되풀이하면서 타이르시는 아버지 말씀이 어느새 내 안에서 살아 뿌리내리고 내 잠재의식까지 흔들어주었다. 나도 모르게 할 수 있다고 믿게 되고, 노력하게 되고, 자기암시가 되어 마침내 극히 작은 부분이나마 자신을 개조해 나가기에 이르렀다. 물론 급히 서두른다고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요, 서서히 점진적으로 일생을 두고 노력하여 보다 나은 방향으로 고쳐나가고 능력을 키워나가야 할 일이지만, 일단 할 수 있다는 확신만 가지면 가능성은 언제나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내 인격이 지극히 결점 투성이고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만큼이라도 자신과 타인과 사회에 대해 사명감을 갖게 되고, 또 내 능력이나 삶의 태도에 조그만 장점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내 어려서부터 성장할 때까지, 아니 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하직하실 때까지 내게 일관되게 기울여 오신 교육과 기대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학창시절 남녀공학에서 남학생들보다 앞서가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켜 묵묵히 노력하고 겸손할 수 있었던 것도, 내 작은 가슴에 우주를 안으려 지금껏 노력하는 것도 모두 아버지의 교육 덕분이다.

  부정父情이 사라져 가는 사회, 엄부嚴父의 위상이 깨어지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위상이 정립되지 못한 오늘날의 사회, 공부만 잘하면 다른 어떤 것을 희생해도 좋다는 목적 지향적 교육과 정서부재의 교육풍토, 마지막 보루이자 교육의 출발점인 가정교육조차 부재하는 현 세태를 보면서 자애롭고도 엄격하여 지나침이 없던 아버지의 품속이 새삼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p. 83-84)

 

   부모님하시는 일 언제나 거들도록

  아버지는 퍽도 자상하셨다.

  어린 우리들에게 썰매도, 팽이도, 연도, 연자세도 손수 만들어 주시고 달밝은 밤이면 사다리 타고 올라가 초가지붕에 참새잡이도 함께 하셨다.

  그러나 일꾼들과 같이 들에 나가 일하실 때면 우리들을 꼭두새벽에 단잠을 깨워 같이 데리고 나가셨다. 벼를 벨 때면 곁에서 메뚜기도 잡고, 볏단을 묶을 때면 논고동을 잡고, 볏단을 거둘 때면 남은 벼이삭을 줍고, 타작할 때에는 이삭을 털고 난 볏단을 치우다가 짚단 속에 들어가 숨바꼭질을 하며 놀더라도 꼭 함께 참여하도록 하셨다.

  부모님께서 하시는 농사일을 귀하게 생각하고, 작은 힘이라도 보태어 도우며 학교에서 가정실습 시간에 가져오라는 벼 한 되라도 자기 스스로 이삭 주워 가져가도록 지도하셨다. 조금 더 자라서는 모내기할 때에 밀짚모자 쓰고 거머리를 피해가며 못줄을 잡고, 때로는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고 덜덜 떨기도 하면서 이 땅의 근본 뿌리인 농사일과 농사꾼들 사이에서 자신이 꼭 해야 할 일, 걸어가야 할 길을 스스로 찾아가도록 유도하셨던 것이다. 머슴을 둘이나 데리고 농사짓는 대농가였지만, 농번기에는 죽은 송장도 움직인다는 속담처럼 어린 우리들의 힘도 소용 닿는 데가 있기는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노동의 가치와 신성함을 일깨워 참여의식을 지니게 하고, 일 속에서의 성취감을 일찍부터 느끼게 해 주기 위한 가르침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생활이 곧 교육의 장이라는 점을 철저히 인식시킨 결과였다. 그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초등학교 졸업생도 귀하던 가난한 마을에서 배운 사람답지 않게 겸손하고 부지런하고 어른 섬길 줄 안다고 일컬음을 받으며 자랐다.

  노동하는 부모를 부끄러워하고 돈 못 버는 부모를 업신여기며 나란히 걸어가지도  않으려 하고, 계층이 다르다고 무시하고 인간 대접도 안 하는 사례를 가끔 본다. 

  땀 흘려 노력할 생각은 안 하고 바캉스 비용과 유흥비 마련을 위해 쉽게 범죄를 저지르는 이야기를 뉴스에서 보면서, 유년기부터 가정교육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p. 85-86)

 

   남녀차별 않고 인격적 대우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갑내기셨는데 열일곱 살에 결혼하여 다섯 살 터울로 서른둘에 셋째 딸인 나를 낳으셨다. 차례로는 셋째이지만 결혼 후 15년이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출산이었다.

  62.5 동란 때 만삭의 몸이 힘겨워 손등 발등이 소복이 부은 채로 경남 함안군 대산면에서 걸어서 갖은 고생 끝에 도착한 피난처 김해 진영에서, 바라던 아들이 아니라 딸인 나를 낳고 어머니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우셨다고 한다.

  그 후로 어머니는 부처님전이며, 용왕이며 산신에게 더욱 더 공을 들여 그 공덕인지 보모님 연세 서른일곱에 바라던 종손이 태어났다. 온 대소가에서 바라고 기다리다 얻은 가문의 종손이니 오죽인들 귀하였을까마는 아버지께서는 아들딸을 구별 않으셨다.

  동생이 어렸을 때는 아기를 품에 안고 넓은 대청마루를 오락가락하시며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를 위시한 한시들을 자장가 삼아 읊어주며 재우기도 하셨지만, 동생이 자라면서 어쩌다 내게 대들기라도 하면 누나 대접 안 한다고 호된 꾸중을 내리셨다.

  이러한 환경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라났기 때문에 나는 대학 때까지도 남녀차별이란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타고난 능력과 노력만큼 자아실현自我實現하면서 사는 것이 삶이려니 믿고 지내왔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어른이 되고, 아이들 낳아 기르면서 혹은 직장 생활 속에서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편견과 의무와 제한의 울타리가 지나치게 높은 현실에 부딪치면서 그것을 바로잡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 유리천장으로 비유되는 남녀차별의식은 여성 스스로 노력해야 할 몫이 많지만, 여성을 대할 때 성 의구별을 떠나서 인격적으로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하고, 존중하고, 능력만큼 대우하는 일이 선결문제라고 본다. 그래야 점점 더 심해지는 저출산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p. 86-87)

 

   생활 속에서의 언어순화

  서울에서 아주 먼 경산남도 함안군의 산골 마을에 위치했지만, 우리집은 마을에서 표준말 쓰는 집으로 통했다. 초등학교 때에도, 중학교 때에도 나는 서울말 쓴다고 놀림을 받았다. 그것은 젊은 인텔리에 속하셨던 아버지께서 우리 가족에게 표준말 쓰기를 권장하여 잘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사투리나 혹은 좋지 않은 어휘를 쓰면 듣는 사람 누구나 꿀밤 한 대씩으로 벌을 주기로 약속하여 습관화시켰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공책 산다고 돈 달라고 하면 "빌어묵을 놈, 핵교 가지 말고 아(아기)나 봐라." 하고 엄마가 야단치던 분위기 속에서, 언니가 만들어준 세일러복을 단정하게 입고 표준말을 쓰는 나에게 서울말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아이들은 서울말 쓴다고 놀렸던 것이다.

  또한 아버지는 일본말이나 일제시대의 잔재로 보이는 어휘를 들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지적하여 바로잡아 주시는 민족주의자이셨다.(내가 어릴 때 경상도지역에는 일본말 어휘가 많이 남아서 사용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민족의 주체성과 나라사랑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생각해보게 되었으며, 후에 서울생활을 하면서 표준말을 익히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자라서 서울에서 국어를 가르치게 될 줄을 미리 짐작하셨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덕분에 토박이 사투리에 대해서는 오히려 잘 기억 못하게 되어 시를 쓰는 입장에서는 일장일단이 있는 셈이라고 할까.

  또한 아버지는 골짝 동네 호랑이로 소문 나 있었다.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이웃 동네 청년들까지 큰 소리로 떠들고 고성방가하다가도 우리집 옆을 지나갈 때는 입을 다물고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였다. 자식을 가르치고 훈도하는 데에는 내 자식 남의 자식 가리지 않고 온 고을 청소년들을 다 지도하셨다.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이러한 '어른의 정신'이 아쉽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교육방법 중에서 감정적인 차원에 머문다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점도 많이 있지만, 원칙적인 줄기에 있어서는 그 시대와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참으로 앞서 있었고 진취적이며, 이성적이고, 의도적이었다. 엄한 면과 자상한 면을 동전의 양면처럼 적절히 조화시킨 바람직한 방법이 많았다고 생각된다.

  나 자신도 아이를 낳아 기르고 직장에서도 명색 교육의 장에 서 있으면서 시시때때로 접하게 되는 자잘한 사건들 속에서 절제하지 못하는 감정을 그대로 아이에게 분출시키는 때가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요즘은 더욱 어버지께서 몸소 보이셨던 지혜로운 교육의 방법을 되새기게 되고,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제 1의 교육자로서의 현명한 부모, 지혜로운 선생이 되기 위해 스스로 행동하여 모범을 보이며 끝없이 자신을 다스려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내게 남긴 진정한 교육의 과제일 것이다.

 

  오늘 아침 출근길 버스 속에서 앞자리에 앉은 할아버지의 야윈 팔뚝을 보고 문득 "아버지!"하고 부여잡으려다가 깜짝 놀라 멈추어 섰다.

  검게 그을은 팔뚝에 툭툭 불거진 힘줄이 몇 가닥, 희끗한 머리카락 아래 그을린 목줄기며 구부정한 동덜미가 볼수록 영락없이 아버지 모습   이 땅의 선량한 촌로村老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렇게 요즘도 나는 곳곳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세월이 흐를수록 가슴에 사무쳐 오는, 지금은 이 세상에 아니 계신 아버지. 내 살과 뼈 속에, 나의 사고 속에 늘 함께 살아 숨쉬는 아버지. 당신께서 몸소 실천하신 자혜로운 교육법을 늘 되새기며 걸어가려 한다.

  이秉字 아버지 영전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시 한 편 바친다. (p. 88-90)

 

  아버지 산소 그늘

  진달래꽃그늘에 앉아

  진달래꽃전을 부치고

  진달래꽃술을 마신다

 

  은저휴래향만구銀箸携來香灣口

  은수저로 집어서 입에 넣으니

  입안이 가득 향기롭구나

 

  아버지가 달필로 써주시던 선인의 시를 읊어본다

  어느새 곁에 와 앉아 읊어주시는

  아버지 목소릴 듣는다

 

  저기 남강물 푸르게 흘러가는 먼 훗날에도

  이 언덕에 아이들 뛰놀고 꽃은 피어나리라

  저 산에 저 강물에

  봄풀의 이별눈물도 넘쳐흐르리라

     -전문(p. 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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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선 수필집 『아버지의 교육법』 에서/ 2022. 5. 25. <시문학사> 펴냄

이혜선/ 경남 함안 출생, 1981년 월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흘린 술이 반이다』『운문호일雲門好日『새소리 택배』 『神 한 마리』『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 『새소리 택배』『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神 한 마리, 영역시집『New Sprouts You』(공저), 저서『문학과 꿈의 변용』『이혜선의 시가 있는 저녁』『이혜선의 명시산책』, <진단시> <남북시> <유유> <향가시회>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