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획 5/ 박순례

검지 정숙자 2023. 10. 3. 14:21

 

    획 5

       획 하나 꿈을 꾸고

 

     박순례

 

 

  시체가 되어 냉장된 일을 그리 슬픈 일은 아니야 철 지난 신문지에 꽁꽁 묶이거나 검은 비닐봉지에 포장되어 습도가 높은 곳에서 편히 눕는 일이지 냉동이 해제될 때까지 우린 서로 부동켜안고 포개져 뒤뚱대는 거지 어느 날 열린 문 사이로 빛이 스며들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그곳은 우리의 안식처인 거야 안식처에서 나와 끓는 온도로 뛰어들고 우린 부활을 꿈꾸지

 

  나의 정원에 꽃을 심는 일은 화선지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일. 잡초를 뽑는 일은 하나의 획을 지우는 일. 화선지에 꽃잎을 그리며 나의 정원을 꿈꾼다 풍요로운 정원에 그려가는 나의 그림 한쪽엔 마늘 고추 상추 울타리를 치듯 뽕나무 살구나무 감나무 매실 피워 낸다 꽃은 나를 위로하며 자리를 넓힌다 수국 목단 할미꽃 앵초 화단에 새로운 꽃 그림이 늘어 가고 명자 찔레 모두가 모이는 자리. 저녁이 되면 노을은 담장에 걸려 정원 꽃들을 어루만진다 그림 속 노을 한자리 꿰차고 앉아 나 꽃으로 남는다 그 사이 획 하나 늘어나고 마술사 같은 나의 손끝에 물이 들고

    -전문(p. 39)

 

  -------------------

  * 시목문학회 사화집 『즐거운 곡선에서 배회 중』에서/ 2023. 8. 10. <파란> 펴냄 

  * 박순례/ 2016년『여기』로 등단, 시집『침묵이 풍경이 되는 시간』『고양이 소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