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 환한 곳
고은유
나는 환한 길만 걷는다
절도있게 줄 맞추어 서 있는 아파트
예측할 수 있는 곳에 문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추를 누르면
자동으로 문이 닫히고 열린다
큰 사각의 건물이 너무 뻔해서
헤맬 이유가 없다
골목은 없다
각자의 방에서
앉고 눕고 밥 먹고 잠들며
시멘트벽을 믿으며
섞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붙어 있다
친구네 아파트에서 길을 잃었다
너무 빤해서 구별할 수 없는 아파트가
도서관의 책처럼 끝도 없이
갈피를 넘겨볼 수 없는 건물이
너무 환한 불빛 아래서
네가 보이지 않는다
너는 어느 서랍 속에서 사는가
-전문(p. 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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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1호)/ 2022. 12. 31. <서정시학> 펴냄
* 고은유/ 2021년 『서정시학』 신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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