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불빛 환한 곳/ 고은유

검지 정숙자 2023. 7. 11. 02:52

 

    불빛 환한 곳

 

    고은유

 

 

  나는 환한 길만 걷는다

 

  절도있게 줄 맞추어 서 있는 아파트

  예측할 수 있는 곳에 문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추를 누르면

  자동으로 문이 닫히고 열린다

 

  큰 사각의 건물이 너무 뻔해서

  헤맬 이유가 없다

  골목은 없다

 

  각자의 방에서

  앉고 눕고 밥 먹고 잠들며

  시멘트벽을 믿으며

  섞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붙어 있다

 

  친구네 아파트에서 길을 잃었다

  너무 빤해서 구별할 수 없는 아파트가

  도서관의 책처럼 끝도 없이

  갈피를 넘겨볼 수 없는 건물이

 

  너무 환한 불빛 아래서

  네가 보이지 않는다

  너는 어느 서랍 속에서 사는가

     -전문(p. 10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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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1호)/ 2022. 12. 31. <서정시학> 펴냄

  * 고은유/ 2021 『서정시학』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