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동 641번지 종민이네 들깨밭
이명열
깻잎이 엽서 같다고 하자
편지를 쓸 만큼 따가라고 한다
8월의 햇살에 한 잎씩 씻어
물기 뺀 자음과 모음을 소쿠리에 담으며
눈여겨보지 않은 시간들 다 놓치고
간추리고 걸러내고 잘 지내느냐고 한 줄 쓰고 나니
부랑의 날들 한뎃잠을 자듯 얽히고 설킨다
은닉하듯 쌓아둔 숙제에 배를 쭉 깔던 여름
깻잎처럼 차곡차곡 개켜진 공책의 침묵은 무뎌서
증거를 인멸하듯 연필이 부러지고
표류하던 생각의 거짓 진술에 공책은 찢어지고
고스란히 가라앉은 날것의 향
오래 삭혀 깊은 맛을 낼까
은유의 양념으로 초록의 임맛을 돋울까
고민은 오타 없는 잠에도 따라와
윗목에 밀어둔 숙제처럼
초록의 공책을 뒤적인다
-전문(p. 99-100)
----------------------------------
*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1호)/ 2022. 12. 31. <서정시학> 펴냄
* 이명열/ 2020년 『서정시학』 신인상 수상
'사화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순영_김기림, 1939년, 시의 미래, 미래의 시(전문)/ 길 : 김기림 (0) | 2023.07.10 |
---|---|
쟁기거북 주홍글씨/ 이수국 (0) | 2023.07.10 |
고월/ 박금성 (0) | 2023.07.10 |
소주/ 손지안 (0) | 2023.07.09 |
나의 새/ 김조민 (0) | 2023.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