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가도 가도 왕십리/ 한영수

검지 정숙자 2023. 7. 8. 17:12

 

    가도 가도 왕십리

 

     한영수

 

 

  가고 있는데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무엇이 있지 않고 왜 허공이 있나

 

  빛보다 그늘을 키우는 나무야

  성문 밖에 동떨어진 나무야

  가도 가도 왕십리

  한 발 기울어진 나무야

 

  성당과 공원과 테니스코트와 학교 담장을 지나

  구월의 태풍과 뒹구는 사과와 죽은 엄마와 수수한 들풀을 따라

  민속대사전과 고어사전과 문장백과사전과 현대조선어사전의 일상 사이

 

  녹슨 해방구의 나무야

  방울뱀은 어떻게 독을 품게 되었나

  독은 어떻게 방울뱀을 살게 하나

  생각지 않은 곳에서 생각하는 나무야

 

  수만의 날쌘 날개를 달고도 하늘과 바람을 독점하지 않는 나무야

  가고 싶은 쪽으로 가는 길을 스무 개도 더 말할 수 있지만

 

  지우면서 머무르는 나무야

  창문 밖에 성문 밖에

  우리 가운데

  절정의 언덕 위에

 

  혼자서 가는 나무야

  비의 얼굴로 깨어나는 나무야

    -전문(p.41-42) 

 

   ----------------------------------

  * 서정시학회『미래 서정』(제11호)/ 2022. 12. 31. <서정시학> 펴냄

  * 한영수/ 2010 『서정시학』 신인상 수상, 시집『케냐의 장미』『꽃의 좌표』『눈송이에 방을 들였다』『피어도 되겠습니까』

'사화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주/ 손지안  (0) 2023.07.09
나의 새/ 김조민  (0) 2023.07.09
이제 어떻게 그리워하나요/ 박정서  (0) 2023.07.08
마스크를 쓴 천사/ 정혜영  (0) 2023.07.08
어머니 범종소리/ 최동호  (0) 2023.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