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에 버려진 배춧잎에 관한
정병근
천변 산책로 밑 외진 물가에 배춧잎 서너 장이 버려져 있다.
자전거 짐받이에 배추 한 단을 싣고 온 남자는 자전거를 도로 옆에 세우고 배추를 들고 이곳으로 내려와 겉잎을 뜯어서 버리고 앞 배추를 들고 다시 올라가서 전전거에 싣고 집으로 간다고? 만일 이러려면 배추 한 단을 안고 하필 여기에 와서? 대체 어떤 마음일까? 버려진 배춧잎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담배 한 대 피우기에 손색없는, 비닐과 셔틀콕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낡은 배구공이 미스터리처럼 불쑥 발견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타다만 장작을 발로 툭툭 차다가 오줌을 갈긴들 보는 이도 지적할 이도 없을 이런 곳에 버려진 배춧잎을 설명하기가 영 쉽지 않아서.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거지. 세상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고 겸손한 결론을 내리고 다시 산책로를 올라와 걷는다. 배춧잎을 버리고 간 사람은 수많은 국민의 한 사람 중에 그 한 사람일 거라고 확신하면서.
-전문(p.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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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 2024-여름(96)호 <신작시> 에서
* 정병근/ 경북 경주 출생, 1988년 계간 『불교문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번개를 치다』『태양의 족보』『눈과 도끼』『중얼거리는 사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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