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계간 파란』 2017 가을호- 주체(발췌)

검지 정숙자 2018. 6. 2. 18:30

 

 

    계간 파란 2017 가을호         주체   

 

 

     issue  주체(발췌)

 

 

 

   이현승(계간 파란 편집 위원)_ 하하호호연합과 사랑의 시작 

  조지 레이코프에 따르면 언어에는 개별적인 어사 이전에 어사를 놓는 위치와 짜임의 방향이라는 면에서 이미 하나의 은유적 이해가 가로놓여 있다. (……) 어떠한 의미에서든지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고자 하는 기도, 새로운 세대의 실패에 대한 관대야말로 지금 우리가 갖추지 못한 미덕이라고 확신한다. 가령 아름답고 평화로운 성적 평등응ㄹ 위하여 최근의 문단 내의 성 추문과 관련된 일련의 일들은 미흡하나마 우리 사회의 평등에 대한 요구가 일정 부분 성장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로 문학이나 시가 보다 근원적으로 표현의 자유라는 권한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한층 성숙한 성도덕을 내면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올바름이 이끄는 힘에 따라서 나쁜 관습과 결별해야 할 시점에 있다. 그것을 위한 여러 운동에 적극 지지한다. (권두 에세이. p.p. 4. 6.)

 

 

    issue 1 주체 - 질문들(발췌) 

 

  백무산(1984년 『민중시』로 시인 등단,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폐허를 인양하다』등)

  촛불은 아직 '혁명'이 아니다_ 촛불 혁명의 수행 과제가 전적으로 보수 정당에 맡겨져 있는데 무엇을 혁명이라고 하는가 // 우리는 사회 갈등 속에서 형성되는 폭력적인 대결 구도를 이해해야 한다. 좌우 대립이 결국 전쟁으로까지 비화되면서 선과 악의 경계도 소멸해 버리는 비극적인 과정을 우리는 경험했다. 근대화 과정은 결코 단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통 사회와의 심각한 갈등과 파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후진적인 정치 수준과 야만적인 자본축적의 과정에서 가치관의 혼란과 이념적 갈등을 겪는다. (……) 김대중 · 노무현 정부는 1980년 광주와 부미항쟁, 6월 항쟁 등 시민들의 희생과 헌신적 투쟁으로 만들어진 정권이다. 그러나 그 정권들은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실망을 안겼다. 그 결과는 참담하게도 과거 세력들을 불러내었고, 10년 세월 민주주의는 역행했다. 그 반성 위에서 이제 겨우 20년 전 상황으로 돌려놓은 정도다. 이것을 역사적 진전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사회는 변화했고 시민들의 의식 역시 크게 달라졌지만, 정치체제는 진전된 것이 아니라 과거를 회복한 수준에 불과하다. 또한 과거 '민주정부'의 과제가 현재로서는 보수정당에 전적으로 맡겨져 있는데 무엇이 혁명이란 말인가? 촛불이 정치체제의 변화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화와 사상과 관습 등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변화의 주체로 나서기 전에 섣부르게 등장한 '혁명'이라는 단어는 피곤을 유발할 뿐이다. (p.p. 21. 27.)

 

  염인수(현재 순천향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고려대학교 강사, 역서 『알랭 바디우 비판적 입문』『공산주의의 현실성』『루저-권위를 잃은 아들의 정치』)

  탄핵의 촛불에서 사건의 주체로_ 혁명 이후 '주체의 이론'// '어둡고 깊은 직관이 겸손과 사랑을 기른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메마름을 견디는, 이런 믿음과 인내의 임자에게는 주체의 표지가 새겨져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 라캉이나 알튀세르나, 1968년 이후 두 이론가가 공히 주목했던 바는 주체에게 주체적인 의지, 임자의 역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20세기 초, 혁명적 국가 건설을 가능케 했다고 여겨진 의지주의에 일종의 파산선고를 내린 것처럼 보였다. 운동하는 주체 앞에 버티고 있는 난관, 주체의 의식 너머에 있기에 의지로 돌파할 수 없고, 원천적으로 가로지를 수 없는 궁지를 명료하게 밝혀내고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개별자 앞에 가로놓인 내적 난관을 이론화했고, 알튀세르는 개별자가 처해 있는 상황을 지배하는 외적 궁지를 이론화했으니, 지평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거나 메시아주의에 전념하는 일 말고 개별자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p.p. 41. 43.) 

 

  이택광(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교수)

  박근혜, 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복지국가론의 반대편에 있는 이른바 '보수'의 주장은 대체로 시장주의에 가까운 것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복지국가론이든 시장주의든, 둘은 자유주의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전자가 앞서 이야기한 '변형된 자유주의'라면, 후자는 원본 자유주의이다. 앞서 논의했듯이, 푸코에 따르면, 18세기 후반에 '최소 정부'가 정치의 목적으로 등장하면서 '통치 기술'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푸코는 이것을 '자유주의의 통치성'이라고 불렀다. 푸코는 '경제적 자유'를 자유주의의 핵심으로 파악하면서, 이것을 '시장의 자유'와 등치시킨다. (……)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진적이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너무도 기계처럼 잘 작동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알랭 바디우를 변주해서 말하자면, 이 민주주의의 기계에서 누락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왜 민주주의를 하는가'라는 기원적 질문이다. 이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민주화 과정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진리의 주체들'일 것이다. 보인다. (p.p. 75. 87.)

 

  강병익(한국 정치 전공,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에서 '시민교육' 강의, 공저 『다시 보는 한국 민주화 운동: 기원, 과정, 그리고 제도』『다중 격차, 한국 사회 불평등 구조』『한국의 불평등 2016』, 역서 『유럽 정당의 복지 정치』)

  광장의 주인에서 정치의 주체로// 그 결과 돈 많은 사람의 자녀가 이른바 명문 대학에 들어갈 확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높고, 아는 다시 부를 더 많이 획득하게 되는 더 많은 기회의 축적으로 이어진다. 말이 기회이지 이는 노력 없이 지위를 통해 획득하는 지대(rent) 에 가깝다. 이렇게 '교육-자산-소득'의 순환 관계는 토마 피게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언급한 '세습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는 주로 정치 주체로서의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보장 방안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 박근혜 탄핵 이후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광장에 다시 촛불이 밝혀지고 있다. 적폐 청산이 한 번의 정권 교체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 온 폐단'이란 의미 자체가 무색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국민은 지난 역사에서 오만한 정치권력을 예외 없이 국민의 직접 행동을 통해 심판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그 이후였다. 4.19 이후 민주당 정권의 부패와 분열, 6월 항쟁 이후 야권의 분열, 97년 이후 민주 정부 하에서 벌어진 신자유주의 개혁과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심화, 그리고 그 후과로 등장한 보수정부의 독단적 정책 결정과 권력의 사유화까지. 이제는 광장의 주인에서 정치의 주체로서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를 바로 세우는 동시에 국민과 시민 개개인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제도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 (p.p. 100. 106~107.)

 

  강지윤(국문학 연구자, 현재 연세대학교 젠더 연구소 연구원)

  공감의 움직임과 고통의 공유 불가능성 사이// 현재 페미니즘 담론은 숙원宿怨들의 전시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페미니즘의 확산은 분명 촛불로 이어진 정치적 열망의 확대와 연결되어 있다.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비루함과 도처에 잠재되어 있다가 가시화되는 폭력을 개별적인 사건이나 비극으로 해체시켜 버릴 수 없다는 위기의식은 일상의 면면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던 상황이 정치의 총체적 실패로 자각되었던 상황과 함께 커진 것이다. 비슷비슷한 삶의 증언들은 구조적 얽매임을 실체화했다. 가부장제라는 해묵은 비판의 대상이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도 이토록 노골적인 모습으로 생존해 왔다는 사실이 겸연쩍을 따름이다. 사람들은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주인공, '시대의 전형'이라는 소설적 인물의 복고적 모델에 깊이 공감한다. (……)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라캉의 악명 높은 언명을 글자 그대로 떠올리게까지 한다. 즉 지워지는 한에서만 쓰일 수 있는 것./ 한때 페미니스트의 저주를 받았던 이 말은 사실 남성이 여성을 '비-전체(not-all)', 다르게 말해 부분 대상 a로만 상대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주판치치는 이 말이 가부장적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폐하거나 극복하려는 시도가 여성 억압적인 가부장제로 귀결되었다는 점을 폭로한다고 설명한다. (p.p. 111. 112.)

 

   

    issue 2 주체 - 상상하는 혁명들(발췌)  

 

 

  기혁(2010년『시인세계』로 시인 등단, 2013년 《세계일보》로 문학평론가 등단, 시집『모스크바예술극장의기립박수』)

  광장의 리얼리즘, 말소된 갈등의 가능 세계// 다수의 언론사들은 '민주주의'라는 대의 앞에,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갈등까지도 초월할 수 있다는 지극히 '반민주주의'적 당위로써 '자발적 참가자'들을 포장함으로써, 우리의 관심을 매주 갱신되는 참가 인원의 '수치'로 돌려버렸다. (……) 호명할 수 없는 광장의 주체들, "1,337만 명이라는 연인원"으로 환산되는 주체를 호명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문학만을 알고 현실을 모르는 자의 "무지"가 마침내 퇴보의 가능성을 여는 세계가 도래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광장의 경계를 무너트리거나, 광장을 잊는 것밖에는 없다. 그것은 지금껏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문학과 정치를 분리시키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p.p. 131. 140.)

 

  김건영(2016년『현대시』로 시인 등단)

  농담은 광대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광장에 나와서 연애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이들과 함께 나와 정치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는 양초를 팔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손짓으로 흥정을 한 후 촛불을 사서 들고 합류하고 있었다. 한마음으로 구호를 외쳤다. 광장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념이 저마다 다르고 뜻한 바가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저항이었다. 그것은 농담을 통해 가능했다고 믿는다. (……) 앞서 말했듯이 좋은 농담은 항상 자신을 농담의 대상으로 포함한다. 그러한 농담을 하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기 때문에, 적아를 구분하기에 앞서서 스스로 바보가 된다. 바보가 된 자는 현자의 말을 내뱉을 수 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높은 자들을 놀릴 수 있는 것은 더 높은 자가 아니다. 스스로 우스꽝스러워지려는 자들이다. 최근 일단의 진보 언론과 시민들의 갈등도 이러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p.p. 147. 149.) 

 

  김덕희(2013년 《중앙일보》로 소설가 등단, 소설집『급소』)

  촛농을 긁으며// 그 뒤로 시청역에서는 지상으로 올라가기 전에 경찰들의 안내를 받을 수 잇었다. 촛불은 왼쪽 출구, 태극기는 오른쪽 출고로 나가야 한다는 식이었다. 굳이 안내를 받지 않아도 태극기 쪽의 대부분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기에 내가 어디로 나가야 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경찰은 길을 안내했다. 앞 사람의 뒤통수를 코앞에 두고 걸어야 할 만큼 인파가 빼곡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경찰로서는 태극기를 휴대하고 있으면 오른쪽으로, 그렇지 않으면 왼쪽으로 안내했다./ 경찰로서도 애매하면 얼굴에 드러나는 나이로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했으리라. 나이만으로 양분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까다로운 경우엔 직감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터, 젊은 사람이라도 뭔가 보수적인 인상이 풍기면 오른쪽으로 안내했던 모양이다. 한 술자리에서 친구 하나가 우스갯소리처럼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촛불집회에 가려는데 태극기 쪽으로 안내를 받았다고 했다. 자기는 당연히 왼쪽 길을 알고 있었고 그리 가려는데 경찰이 팔을 뻗어 앞을 가로막더라나? 가방에 달고 있던 노란 리본을 보여 주자 그제야 경찰이 길을 텄다고(p.156~157.) 

 

   김사이(2002년『시평』으로 시인 등단,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

  일상에서의 촛불에 대한 단상// 촛불로 바꾸자고 한 현실이 있고 촛불로 바뀐 현실이 있을 것이다. 자꾸 되묻게 된다. 대중의 거대한 열망은 촛불을 켜서 길을 만들었다. 촛불의 힘을 몸소 경험한 개인들이 일상에서 바뀌고 있는가, 개인들의 삶 또한 달라지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청소년 자살률, 남녀 임금격차, 노인 빈곤율, 성 평등 지수 등등 OECD 기록을 세우는 현실에서 촛불은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선뜻 확신하지 못하겠다./ 광장의 대중에서 개인으로 돌아오면 일상은 언제나 사투의 장이다. 일상에서 촛불을 들 수 있을까. 노동조합 파업에는 촛불이 켜지지 않는다. 무차별 여성 살해에도 대중의 촛불은 광장에서 타오르지 않는다. 생존 자체가 위험한 계층일수록 촛불을 쉽사리 켜지 못한다. 광장으로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들과 함께하는 촛불도 쉽게 켜지지 앟는다. 부당한 차별을 받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도 너와 나는 그와 같이 살기 위한 촛불을 들지 못하고 각자 살기 위해 외면하는 현실이다. (p. 162~163.)  

 

   김산(2007년『시인세계』로 시인 등단, 시집 『키키』『치명』, 프로젝트 '김산밴드'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다.)

  어디에 있습니까? 광장은,// 나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그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다. 20년 전, 강원도 군 복무 시절, 첫 투표건으로 대선을 참여한 후로 사회에 나와 나는 참정권을 포기하고 살았다. 몇 번을 찍었다면 SNS 인증샷을 올리고 그것을 본 지인들은 '좋아요'를 누르고 서로의 연대를 확인하고 증명하며 또 하나의 집단을 만드는 것이 사실 나는 몹시 불편했다. 그런 정치적 입장 표명도 그렇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언어를 부풀리고 사진으로 미화하는 것들, 무엇보다 검증되지 않은 사건들이 마치 정의이고 진실인 것처럼 일파만파 퍼져 나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안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중요한 진실을 양심 있는 관계자의 용기로 밝혀지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그러한 부분들은 SNS의 순기능일 것이다. 나는 몇 해 전, 호기심에 잠깐 했던 SNS를 하지 않는다. 첨단의 시대에 실시간 소통을 하며 연대를 같이하는 것도 좋지만 조금 더디고 느린 것은 어떨지 생각해 본다. 무작정, 자신이 원하는 내용이라고 퍼 나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어떨는지. (……) 나는 아무것도 지지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시를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으며 때문에 시의 언어와 시가 숨 쉴 수 있는 곳이면 언제든 그곳에 돗자리를 펴고 광장을 세울 것이다. 그곳에 깃발이 없어도 좋다. 흥을 돋우는 유명 가수들의 공연이 없어도 좋다. 내년부터 기타와 시집을 들고 거리로 나갈 생각이다. 저자를 한 명씩 섭외해서 낭송을 하고 그 시로 만든 노래를 독자들과 함께 부를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나는 난장을 펼 것이고 그곳이 내각 생각하는 광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공원에서 시집을 펼치고 키득키득 웃고 때론 상념에 젖으며 누군가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작은 불씨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시의 촛불이다. (p.p. 168. 172)

  

  김안(2004『현대시』로 시인 등단, 시집『오빠생각』『미제레레』)

  광장, 생활, 비극//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광장의 목소리가 외쳤던 그것들. 각자의 모든 정의들. 정의의 총체. 나는, 다시 멀찌감치 생활의 자리에서 뉴스를 통해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정의의 외침을 듣고 있었고, 동시에 조잘대는 딸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뉴스를 통해 바라본 정치인들은, 정의와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의와 욕망. 정의의 욕망. 욕망의 정의화. 그리고 생활. 생활이라는 정의. (……) 생활은 언제나 슬픔과 고통과 참사와 함께하는 것. 이 아이가 자라며 겪게 될 그 어떤 참사들이 이 아이를, 이 아이가 외쳤던 외침을 다시금 불러낼는지 모른다. 주체를 만드는 것은 고통, 참사, 슬픔, 그리고 죽음. 그것들이 '나'의 바깥에 버려져 있는 주체들을 바라보게 한다. 그들로 인하여 울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은, 그 강도만이 다를 뿐, 또다시 이 아이에게 반복될 것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죽음이 대속代贖이 연합을 대산한다"고 했던 모리스 블랑쇼의 말처럼 이 아이가 겪고 보게 될 죽음들이, 죽은 자들의 고통과, 죽은 자들의 죄가 이 아리를 주체로 만들 것이고, 다른 이들과 어깨를 겯지르게 만들 것이다. 증언이 불가능한 그 비극들. 그 죽음들. 결국 주체를 만드는 것은 비극의 몫이고, 그 주체의 입은 곧 죽음으로 말을 잃은 이들의 언어의 풍경을 내보이는 창이다. 단지, 언젠가 이 아이가 내가 쓴 이 잡문들을 읽으며, 이 잡문들을 찢으며 한 걸음 더 내딛어 생각하며, 연대하길 바랄 뿐. (p.p. 176. 179~180.)

  

  김찬기(1991년 《세계일보》로 소설가 등단, 창작집 『달마시안을 한번 보러 와 봐』, 엽편소설집 『그 여름의 앞니』등, 국문학연구서『서사란 무엇이었는가』『한국 근대소설 형성과 전』 『한국 근대소설과 전통』등)

  같은 곳에서 서로를 본다는 것//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 후기 내내 한양은 노론의 도시였다. 노론 세도가들은 한양의 모든 기득권을 독점했다. 병권도, 경제력도. 그리고 입현무방의 원칙마저 모두 무너져 내린 한양은 그들만의 도시였다. 그 어떤 세력도 경화세가나 벌열 가문이 구축해 놓은 기득권을 허물어뜨릴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들 주위에 포진했던 겸종들이 은밀하게 구축해 놓았던 이권조차도 어지간히 사대부나 지방의 향암을 훨씬 넘어서는 형국이었다. 오죽했으면 "사주도 문벌을 어쩔 수 없다"는 한탄이 있었겠는가. 개인의 타고난 운명도 문벌을 어찌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이 스치운다"는 윤동주의 시를 보고 있고, "눈은 살아 있다"는 김수영의 시를 보고 있고,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는 이성복의 시를 보고 있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는 황지우의 시를 보고 있고, "분별은 사랑의 적이었다"는 이영광의 시를 보고 있고, "촛불을 켠다. 바라본다. 고요한 혁명을"이라는 박정대의 시를 보고 있고, "너를 잃고 너와 싸우기 위해 너에게 간다"는 장석원의 시를 보고 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는 진은영의 시를 보고 있고, "한가한 사람의 취미는 참으로 유유하다閒人趣味信悠然는 신채호의 열일곱 때 시를 보고 있다. (p.p. 182. 184~185.)

 

  김해자(1998년『내일을 여는 작가』로 시인 등단, 시집『무화과는 없다』 『집에 가자』등, 산문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 『시의 눈, 벌레의 눈』, 민중구술자서전『당신을 사랑합니다』등)

  촛불은 횃불이었다// 나는 촛불혁명으로 세워진 정부가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리라 기대하지 않으며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러기엔 지난 시간 곪아 온 적폐의 환부가 너무 오래고 깊다. 내 자식들이, 내 자식과 자식들의 자식들이 써야 할 자원과 자유를 미리 끌어와 치부하며 망가뜨린 부위들이 너무 넓다. 청렴과 정의를 말하기엔 대한민국의 지도층들은 서민이 살아가는 삶에 대해 너무 실감이 없으며, 위정자들의 양심을 믿기엔 시스템이 너무 낡았다./ 그러나 반걸음만이라도 나아가야 한다. 그 반걸음은 민주주의의 근간인 시민들의 의식 변화와 통찰과 실천과 연대가 손을 맞잡아야만 가망이 있다. 생태계의 위기와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는 빈부 격차와 파괴되는 공동체 속에서, 나는 돈과 숫자와 개발과 철밥통의 세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나가는 젊은 정신들의 대열을 꿈꾼다. (p. 195.)

 

  김현(시집『글로리홀』, 산문집 『걱정 말고 다녀와』)

  없는 1분// 최근에 한 친구는 시인의 삶에 관해 적어 발표했다. 원고료를 맑히지 않은 청탁서를 되물을 때의 어려움이나 고료 대신 먹을 수 없는 쌀을 받았을 때의 난감함 그리고 고료만으로는 먹고살지 못해 꾸준히, 열심히 노동하는 삶을 진솔하게 기록한 글이었다. 나 역시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이라 친구에게 잘 읽었노라, 잘 썼노라, 안부 전했다. (……) 광장에서 모든 이가 차별받지 않고 모든 이가 혐오의 대상이 아니었던 건 아니다. 여성들은 촛불을 든 채로 젠더 폭력을 당했고, 성 소수자들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혐오에 노출됐으며, 장애인들은 움직일수록 차별당했다. 촛불 이후에도 낙태죄 폐지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 차별 금지법 제정 등 소수자 인권 보장을 위한 현안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고, 정부의 젠더 인식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성 소수자들의 인권을 빌미로 한 정치권과 언론의 혐오 선동은 더 극악해지고 있다. (p. 202~203.)

 

   문동만(1994년『삶 사회 그리고 문학』창간호에 발표하며 시인 등단, 시집『그네』등)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들의 그날을 위하여// 대형서점에 진열된 책들은 공정하게 진열되어 독자의 선택을 받고 있는가, 한 작가는 그 작품의 능력으로(만) 출현하는가, 많은 문학상들이 정말로 문학적인 선택인가 관계적 선택인가, 교단에서 가르치는 문학들은 문학의 본질적 기질이어야 할 야성적인 감성을 일깨우고 있는가, 기능자로서의 문학관을 교숩하고 있지는 않은가, 왜 백일장을 하면 하나같이 문창과적인 글쓰기가 있다고 지적받는지, 큰 서사를 다루지 못하는지 등등의 질문과 마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SNS나 포털 사이트에서 보듯이 이미 시민들은 독자이자 비평가로 논객이자 제3의 작가군으로 존재한다. 이런 환경까지도 헤아리면서 '자유의지'를 동시에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어느 시절이 와도 차별과 소외는 성찰의 거리로 문학적 주제로 환기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의 우월적 지위, 아카데미 속에서의 우월적 지위, 각종 제도 속에서, 사인 간의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것들. 나는 이런 불공정한 것들이 누누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눈에 들어온다. (p.p. 217. 218.)

 

  박생강(2005년 장편소설 『수상한 식모들』로 문학동네소설상 수상하며 소설가 등단, 소설집 『교양 없는 밤』, 장편소설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등)

'빅쇼'와 파쇼 이후// '박쇼'가 끝나갈 무렵 등골이 서늘해진 건 송지헌 전 아나운서의 낡은 농담이 무덤에서 걸어 나와 무시무시한 진담처럼 변할까 두려워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박쇼'를 강하게 발음하면 너무 섬뜩한 단어로 변하니까 말이다.(『어설픈 예능 토크쇼가 돼 버린 '박근혜 토론', 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 TV, 엔터미디어, 2012. 11. 27.) (……)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주체로서 '나'이기를 꿈꾼다. 그것이 나와 나를 남녀로, 성 정체성으로, 경제적 계급으로, 종교적 신념으로, 나이로, 지역으로 처음부터 편 가르기하려는 낡은 이분법에 걸려들지 않는 첫 번째라고 생각해서다. 그 과정은 쉽지 않고 오해받고 상처받기 쉬우며 혹은 이용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다. (p.p. 225. 228.) 

 

   서광일(2000년 《중앙일보》로 시인 등단, 시집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생각, 콜라주// 프로메테우스가(먼저 생각하는 사람).그는 제우스의 불을 훔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에게 주어질 형벌의 폭력성과 경우의 수를 헤아렸을까? 불을 얻게 된 인간들의 따뜻한 표정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을까? (……)  '생각'이 붓 끝에서, 손 안에서, 몸 안팎에서, 무대 위에서, 화면에서, 광장에서, 건물 사이사이에서, 소셜 네트워크에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또 다른 '생각'을 만난다. '생각'은 원래 함께하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가끔 혼자 있는 '생각'과 마주치면 조심스럽고 어색하겠지만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 것이다. '생각'을 나눌 것이다. (p.p. 234. 235.)

 

   윤은성(2017년 『문학과 사회』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외부로부터의 책상// 내가 다녔던 안산 소재의 학교에서, 누구 한 사람 얼굴이 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떤 교수님은 휴강을 하셨다. 안산에 마련된 분향소에 다녀오면서 동기와 함께 길에서 울었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아니, 다른 이들의 표현처럼 시간이 그렇게 멈추어 있었다. 검은 물결들 속에 그 지역 전체가 잠겨 있는 듯했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나는 나의 진로를 계속 결정해 나가야 했다. 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국문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나의 무지함이 부끄러웠고 더 공부하고 싶었는데, 공부가 힘들었다. (……)  나는 또 내 진로 때문에 평생 고민해야 될 거다. 예술을 통해 무언가를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앞서 언급했는데, 광장 이후의 주체로서 시인인 나는 다만 무기력한 가운데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보려고 한다. 단순한 결론일 수 있으나 솔직히 그렇다. 나는 아직 내가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추측하지 않고 조금은 뒤에서 바라보려고 한다. 일련의 정치적 이슈들의 궤에 맞추어 생각해 보면서, 내가 고립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면 된다. (p.p. 240~241. 242.)

 

   이규민(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국민통합위원회 경기도당 부위원장, 전《안성신문》대표 겸 발행인)

  생각, 콜라주// 그러나 그렇게 우리가 목소리 높여 외쳤던 것들은 해결되었던가? 실제로 촛불집회 이후 우리의 삶은 달라졌는가? 어쩌면 다만 이전보다 뉴스 보기 좀 더 편해진 수준일지도 모른다.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변화 승리를 체감할 수 있는 결정적인 개혁, 개선은 아직 없다. (……) 변화는 미미하지만 근본적이다. 가치관의 변화는 사회 변화의 가장 근본을 이끈다. 보이지 않는 땅속을 면면히 흐르는 거대한 에너지로 축적돼 결국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힘처럼 사람들의 인식 변화는 큰 변화를 준비하고 있으리라. 나는 이 변화를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신생 게릴라들의 출현'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물론 이러한 호름들이 적극적인 사회참여 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현재는 그저 도피의 수준일지라도 근본에 균열을 내는 변화이므로 중요하다. (p.p. 247. 250.)

 

   이영주(2000년 『문학동네』로 시인 등단, 시집 『108번째 사내』『차가운 사탕』등)

  상상하는 자리// 시는 질문으로 가득 찬 세계이다. 전해진 답이 없는 세계이다. 질문과 질문이 만나 미지의 영역을 만들어 내는 세계이다. 쓸데없는 것을 묻고, 쓸데없는 것을 불러온다. 사람들은 시를 향유하면서 매번 정답을 얻지 못한다. 오히려 질문의 길에서 헤매다가 끝날 때가 많다. 하지만 시가 가는 너머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시는 모르는 길로 가는 것이다. 가면서 질문하는 것이다. (……) 주어진 것은 주어지는 순간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인가를 하나 이루어 내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광장의 경험들이 한순간의 추억으로 남지 않고 상상 자체의 힘으로 이어져야 한다고.끊임없이 질문의 탑을 쌓는 내면의 노동을 이어 가야 한다. 이것은 즐거운 상상의 노동. 그렇게 시는 현실과 만난다. 시는 근본적으로 질문하는 현실과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도래할 모순에 직면하고 있다. (p.p. 258. 260.)

 

   이정희(전 통합진보당 대표)

  공존의 책임// 그 항변 뒤에 가려진 것은, 공적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정부의 무책임, 자기 노력으로 경쟁을 통과해 얻은 성과를 비정규직과 나누는 데 흔쾌하지 못한 소시민의 셈법이다. 세월호 참사 가족들에게 생겨났던 미안함은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희생자인 비정규직에게는 이어지지 못한다. '모두가 하던 대로 한 것'의 결과를 자각한 충격도 비정규직 문제로는 번지지 않는다. 촛불혁명의 문을 연 '공존의 책임'은 사라진 것인가. 무엇이 달라서인가. (……) 약자를 흔드는 약자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주체가 될 수 있는가. 경쟁의 극단에 놓여 끊임없이 불안한 자의 자기 연민이 다른 가난한 자를 끌어내리는 것으로 되지 않으려면, 약자의 항변의 말이 차별과 불평등에 고통받는 다른 이들을 향한 연대의 손길로 바뀌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p.p. 265. 266.)

 

   장석원(2002년 《대한매일신문》으로 시인 등단, 시집 『아나키스트』 『리듬』등)

  그것은 '나'이다// 우리는 고요한 촛불을 들고 앉아서 검붉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밀려오는 함성과 촛불의 파도를 주시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 안에 있었던가. 현실 속의 수많은 나'들'이 더 크고 더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 어느 곳이라도 움직여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야 할 길과 가지 않아야 할 길의 구분은 없었다. 긍정문과 부정문이 뒤섞이고 있었다. 준비되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우리가 미련한 것은 실상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전부 거짓이었다. 해체와 건설이 한꺼번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두려워했던 것은 오래된 '나'의 해체였다. 우리는 새로운 우리를 구성할 다른 나'들'의 출현을 꿈꾸지 못했다. 내 안의 다른 나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어떤 힘에 의해서 나는 광장에 던져졌고, 그 힘이 나에게 그곳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나는 광장에서 화형火刑되었다. (……) 1년 전의 그 광장을 지날 때마다, 나는 그 안의 나를 다시 발견하려고 애쓴다. 경험한 그 모든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그날 나는 속삭이는 혁명을 본 것일까. 그날 나는 혁명이라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본 것일까. 우리 안에 그것이, 그것의 실체가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결국, 나에게로 되돌아온 것은 아닐까. 태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나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니라, '나'였을 것이다. 정해진 이념이 아니었다. 선험도 주입도 아닌 것. 나의 흉곽을 뚫고 솟아 나온, 나를 파괴하고 새롭게 탄생한 다른 나, 에이리언 같은, 나의 본모습을 그곳에서 발견했다. 비로소, '나'는 탄생한 것이다. (p.p. 270. 273.) 

 

   전재수(더불어민주당 원내 부대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청와대 제2부속실장)

  촛불과 대의민주주의, 기억과 기대// 제도 정치권의 변화도 극적이다. 국회의원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의 대상이 되고 후원 계좌는 소액 후원자들로 채워진다. 알랭 바디우가 말한 '재현의 정치'에 구멍을 내는 '사건의 정치'와는 별개로, '재현의 정치'에 긍정적 영향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촛불은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스스로가 가진 힘을 체감했다. 광장은 그 어떤 공동체의 문제도 외면하지 않았고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네트워크를 통한 집단적 해결 방식은 우리 사회의 역량이 되었다. 이런 양상은 앞으로 30년 촛불 체제 완성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 의회는 '재현의 정치'에 대한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전문성과 효율성을 강화하여 건전하게 경쟁해야 한다. 성숙하지 못한 정당정치에 대한 성찰과 자기 정립도 필요하다. 촛불 시민이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정립해 나가고, 촛불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기대한다. 촛불이 이제는 각자의 기억 속에서 지속성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광장에서 확인한 가치들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p.p. 279. 280.)

 

   전형철(2007년 『현대시학』으로 시인 등단, 시집 『고요가 아니다』)

  46도에서 48도 사이// 그 코스모스의 세계에 가장 충격적이고 바라보기에 자못 흥미진진한 순간이 있다. 한 세계가 파국에 이를 수 있는 강렬한 사건. 그것은 장수말벌, 우리 동네 사투리로는 '땡기벌'이 침범했을 때이다. 일단 장수말벌은 처참하게도 벌의 마디마디를 잘라 죽인다. 방어가 실패하면 벌통 하나쯤은 소위 사달, 작살이 나 '모두 폐허'가 되지만 꿀벌들의 대항은 자못 미학적이기까지 하다. 멀리서 정찰병 장수말벌이 나타나면 꿀벌 수천이 갑자기 하늘로 날아올라 둥근 원을 이룬다. 소위 봉구(蜂球, bee ball)를 만드는데 한쪽은 뚫려 있는 모양새이다. 그리고 그 봉구의 입구로 장수말벌 한 마리를 삼켜 버린다. 근 한 시간 꿀벌이 봄날 여린 비바람에 후두두 떨어져 내리는 꽃잎처럼 떨어지다 굵고 둔중한 한 마디가 떨어지면 봉구는 뒤 이른 다른 장수말벌을 찾아간다. 그때 나는 그저 저들이 뭉쳐 열심히 물고 뜯었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봉구에는 과학적인 사실이 숨어 있었다. 포위 공격은 소위 '열'과 관련이 있었다. 토종 꿀벌은 48도까지 열을 견딜 수 있는 반면 장수말벌은 46도가 임계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 봉구 안에서 꿀벌들은 장수말벌의 무차별적이고 비대칭적인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 내며 봉구 안에 온도를 높였던 것이다. 46도가 넘을 때까지 날갯짓하고, 서로의 심장을 맞대어 허공의 온도를 높였던 것이다. (p.p. 282~283.)

 

   정의진(파리8대학 문학박사-현대프랑스문학예술이론 전공-졸업, 발터 벤야민· 자크 랑시에르 등에 대한 다수의 논문 발표)

  대일밴드와 주문_ 윤민석의 노래에 감사하며// 전직 대통령 박근혜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2016년 12월 9일, 즉 촛불혁명의 파장이 심화되고 확장되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점으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판결과 함께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만장일치로 탄핵 소추안을 인용하였고, 5월 9일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새 정부는 자신의 정체성을 촛불혁명으로 탄생하였고 촛불혁명의 정신을 계승하는 정부로 규정하였다. (……) 민주주의로 하나 되는 것과, 민주주의이므로 다양한 개성을 만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다시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민주주의는 다양성이며 이의 반대말은 전체주의라는 이분법, 즉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시점에서 극대화된 전 세계의 신자유주의 세력이 유포시킨 이분법의 함정에 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다원성만큼이나, '민중 주권' 또한 거의 강제와 의무에 가까운 민주주의의 입법적 원리이다. 한국문학과 예술이 이 긴장, 이 긴장에서 발생하는 역동성을 잘 감당하고  확장시킬 수 있을까? 그래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는 주문을 일상의 현실로 좀 더 많이, 좀 더 다양하게 전화시킬 수 있을까? (p.p. 289. 295.)

 

   정일권(문학평론가)

  부끄러움에 대하여//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바와 같이 사피엔스 이외의 생물 종에게는 자기들끼리 공유할 수 있는 허구의 질서가 없다. 그래서 이들은 가령 사자의 위협에 닥쳤을 때, 잘해 봐야 '조심해, 사자야!'라는 식의 언어를 동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피엔스는 '사자는 우리 종족의 수호령이다'라는 허구에 기초하여 사회를 조직할 줄 알았다. 바로 그 덕분에 사회적 협력이 가능했고, 그에 따른 사회적 분업도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이래 서서히 도입된, 새로운 상상의 질서는 개별 주체들을 평등하게 열어 주되, 시장에서 각자도생해야 하는 것으로 바뀐다.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이라고 했던. (……) 자영업? 경제학자 이정우는 이 세계의 자영업 시장 비율이 커진 이유가 노동시장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퇴적'된 까닭이라고 했는데, 촌철살인의 지적이다. 이 세계의 노동인구 중 자영업자 비율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30%를 넘나드는데, 이건 산업 기반이 허술한 그리스나 멕시코와 비숫한 수준이며, 대개의 선진국들이 10% 안팎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수치 자체만으로 불안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만 더 보태자. '82년생 김지영'들에게는 원래부터 계단 하나만큼의 장애물이 하나 더 있었으니, 이건 뭘까. 일단 '남혐'과 '여혐'이 난무한다고 해 두자. 자, 우리는 이런 복마전에서 우아하게 '카라마조프카의 형제들' 따위를 읽을 수는 없다. 알다시피 우린 그저 5분짜리 유투브 동영상 클립이면 족하고, 무엇보다 항상 바쁘다. (p.p. 299. 301.)

 

   주영중(2007년 『현대시』로 시인 등단, 시집 『결코 안녕인 세계』)

  열린 공동체의 윤리, 내맡김의 주체// 불행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음험한 움직임들을 잊지 않는 일, 마치 그것이 대지 위에서 사라졌다는 착각과 그렇게 믿고 싶었던 마음들을 되돌아보는 일,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을 음험한 것들과 조작과 야합과 권위와 권력의 은폐된 움직임들을 직시하는 일, 광장을 해체시키려는 움직임들을 좌시하지 않는 일, 그러한 끊임없는 이행만이 중요하다. (p. 310.)

 

   채상우(2003년 『시작』으로 시인 등단, 시집 『멜랑콜리』 『리튬』)

  신이 된 자들// 웃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찬 바닥에 주저앉거나 도로변에 서서 별일 아니라는 듯 그러나 조금은 들떠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은 수줍어하면서 조금은 자랑스러워하면서. 그들은 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내가 본 바로는 그들은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 스스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이룰 수 있는 최대한의 자신들을 기다리고 잇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온 사람들 외에는 모두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함께 그리고 각자,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했다.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 아무도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다들 평온했고 부드러웠다. 정말이지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나는 문득, 두려웠다. (……) 그들은 스스로 말미암고 스스로 자유로운 자들이었다. 영원한 현재 속에서 불타는 이 형상을 두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다.// 그들은 신이다. (p.p. 313~314. 319.)

 

   한용국(2003년 『문학사상』으로 시인 등단, 시집 『그의 가방에는 구름이 가득 차 있다』)

  "가자 청와대로"// 예전에는 돌을 던지는 자와 돌을 던지지 않는 자가 명확히 구분되었다. 돌을 던지는 자와 돌을 던지지 않는 자의 내면은 달랐다. 그 둘 사이에는 전혀 다른 광장이 존재했다. 그러나 새로 열린 광장에서는 달랐다. 촛불만 들면 누구나 대사회적 주체가 될 수 있었다. 광장에 나가지 않아도 어떤 죄의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회 관계망 서비스로도 촛불을 들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나에게 그것은 어떤 변화도 이루어 낼 수 없는 행위로 보였다. 총구 앞에서 꽃을 내미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상적이고 미학적인 행위일 뿐이었다. (……) 여전히 나는 생계형 주체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냉소적인 주체일 수도 있다. 그러나 2016년을 통해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국가'라는 명사를 재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을 뿌리 뽑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여전히 촛불은 꺼지지 않았고, 광장도 사라지지 않았다. (p.p. 323.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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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ssue 1 주체-질문들/ 백무산  염인수  이택광  강병익  강지윤 _ 4명

  > issue 2 주체-상상하는 혁명들/ 기혁  김건영  김덕희  김사이  김산  김안  김찬기  김해자  김현  문동만  박생강  서광일  윤은성  이규민  이영주  이정희  장석원  전재수  전형철  정의진  정일권  주영중  채상우  한용국 _ 2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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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2017-가을호 <issue 1 주체- 질문들 / issue 2 주체- 상상하는 혁명들>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