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자로서의 예술가
오민석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에 의하면 "예술은 자율성을 갖게 된 이래로 종교로부터 자취를 감춘 유토피아를 보존해왔다. 이 문장은 (예술을 포함하여) 문화를 대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 School)의 입장을 잘 요약하고 있다. 그 입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에게 있어서 문화는 (상대적일지라도) '자율성(autonomy)'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다. 그에 반하여 '속류 마르크스주의(vulgar Marxism)'자들은 문화(혹은 상부구조)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문화는 물질적 토대(경제)의 기계적 반영물에 불과하다. 이에 대하여 흐르크하이머,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마르쿠제(Herbert Marcuse), 벤야민(Walter Benjamin)등,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주요 멤버들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를 무(無)매개적으로 동일시하는 논리에 반발했다. 그들에 의하면 문화는 하부구조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문화를 경제와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며 기계적인 발상이다. 둘째, 예술은 유토피아를 지향하며, 이것이 예술로 하여금 현실과 거리를 갖개 해주고, 현실에 대하여 부정적(negative),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유토피아'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며, 앞으로 도래할 그 무엇이다. 유토피아는 현실보다 앞서가며 현실을 '결핍'의 존재로 보게 만든다. 예술은 현실을 결핍의 공간으로 읽음으로써 현실에 도전한다.
한편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멤버들이 볼 때, 모든 문화가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율적 예술(autonomous art)은 오로지 고급문화(high art)로서의 전통 예술, 즉 본격 예술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들이 볼 때 대중문화는 비자율적이고 독점 자본주의의 상품에 불과하다. 자본주의는 기술의 합리성을 동원하여 문화를 상품화할 뿐 아니라, 문화에 대한 대중들의 욕구까지 자본의 생리에 맞도록 조작함으로써 예술의 비판적 기능을 원천적으로 마비시킨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중 조작은 마르쿠제가 말한 바 수많은 '일차원적 인간(one-dimensional man)'들을 생산한다. 일차원적 인간이란 독점 자본주의 사회에서 '표준화된(standardized)' 상품이 되어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유 능력을 상실한 개인들을 말한다.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기술의 합리성(rechnical rationality)이 '지배의 합리성(rationality of domination)'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1950년대 말 이래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확산된 문화 연구(cultural studies)의 성찰에 의하면, 대중문화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러한 해석은 일견 옳으면서도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저항문화(counter-culture)'로서의 대중문화의 존재를 간과했다. 현대의 문화연구자들에 의하면, 대중문화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이라는 순기능만이 아니라, 지배 올로기에 저항하는 역기능도 가지고 있다. 대중문화의 이와 같은 이중성 혹은 다중성을 인지하지 않을 때 대중문화는 애물단지가 되고 만다. 문화 산업의 기술이 고도화되면 될수록 대중문화의 사회적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지며, 괴물처럼 비대해진 문화 산업은 이제 단순한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정확하고 치밀한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발터 벤야민의 이론은 주목할 만하다. 발터 벤야민은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1935)이라는 긴 에세이에서, 소위 "기계 복제" 기술이 발달한 이후에 예술의 지위에 일어난 변화를 다음과 같이 논한다. 기계 복제 시대 이전에 예술은 그 '유일무이성(uniqueness)'과 독창성, 복제 불가능성으로 인하여 제의적이고도 신비로운 분위기, 즉 '아우라(aura)'를 가지고 있었다. 예술의 기원이 종교적 제의였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영화와 사진의 예에서 보듯이, 예술작품은 복제의 대상이 되면서 그 '컬트(cult)'적 특권 즉 아우라를 상실했다. 예술작품은 이제 공장의 벨트라인에서 통조림을 찍어내듯이 무한복제가 가능해졌고, 더 이상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벤야민은 아우라의 상실을 단순히 예술의 상품화라는 부정적인 의미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거꾸로 복제 기술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작품을 제의(ritual)에 빌붙어 그것에 의존하는 기생寄生의 상태로부터 해방시킨다. (……) (복제 기술에 의하여) 예술의 전반적인 사회적 기능은 혁명화된다. 예술은 제의에 기초를 두는 대신 이제 다른 실천 위에 톧대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정치(politics)"이다.
복제 기술은 소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을 다수 대중의 손에 넘겨주었다. (자본주의의) 복제 기술에 의하여 다수 대중은 이제 큰 대가나 부담 없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예술가도 '컬트의 천재'가 아니라 '생산자(producer) '가 되었다. 예술가는 더 이상 신비로운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엔지니어'이며, 예술가는 생산력을 극대화함으로써 예술의 '정치'를 수행한다. 벤야민은 예술에 있어서 '기술(technique)'의 개념을 중시하는데, 이는 (형식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예술의 생산력이 궁극적으로 예술의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그런 것이다. 그에 의하면 "기술의 개념은 형식과 내용의 헛된 대립을 뛰어넘는 변증법적 출발점을 제공한다." 훌륭한 기술은 대중들의 사고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하며, 그들을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 말하는 자'로 유도한다. 대중들의 의식화는 메시지의 일방적 전달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대중들의 자발성이 가동될 때에만 성취된다. 생산자로서의 예술가는 대중들의 자발성을 존중하고, 대중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술'의 생산에 주력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술가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상투성(클리셰 cliche)이다. 클리셰는 대중들에게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한다. 클리셰는 죽은 예술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움은 예술가의 운명이다. 더 이상 새로워질 수 없을 때, 예술가는 이미 종언의 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의 과거와 끊임없이 작별을 고한다. 그들은 한 곳에 영원히 머물지 않으며 자신과 세계를 끊임없이 '탈脫영토화'하는 자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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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림지식총서 567『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2018. 5. 23. <(주)살림출판사> 펴냄
* 오민석/ 충남 공주 출생, 1990년 『한길문학』창간 기념 신인상으로 시인 등단, 1993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시집 『그리운 명륜여인숙』 『기차는 오늘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론 연구서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대중문화 연구서 『나는 딴따라다: 송해평전』, 시 해설서 『아침 시: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산문집 『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등, 현재 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부석 평론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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