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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미_역사소설 『광개토태왕 1』(발췌)/ 별의 바다

검지 정숙자 2018. 6. 25. 21:46

 

 

    별의 바다

      

     손정미

 

 

  우르(광대토태왕을 보필하는 선인)는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찾아온 담덕(광대토태왕 즉위 전 이름)을 쳐다보았다. 간밤에 한숨도 자지 않았다는 담덕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오늘 밤도 꼬박 샐 게 분명했다.

  "하늘의 뜻을 알고 그에 맞게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하늘의 뜻을 알고 그에 따라 산다는 건, 최고의 경지이지요, 하하."

  담덕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우르를 쳐다보았다.

  "하늘의 뜻을 알면 세상의 이치를 관통해, 매사 시시하게 접근하지 않고 허투루 하는 일이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결과가 얼마나 빛나겠습니까. 그럴 때 은합 하나를 만들어도 마치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같이 우주의 순수한 기와 정을 담을 것입니다. 그런 은합이야말로 오래오래 그 멋을 간직하니 즐기고 간직하고 싶어집니다. 우주의 순수한 기와 정을 감았는데 얼마나 멋지고 살아 생동하는 아름다움이 있겠습니까."

  담덕은 자신이 황위에 오르면 그런 은합을 만들라고 지시하리라 마음먹었다. 천년 이상 지속되어 사람들이 보고 뜻을 음미하게 만들고 싶었다.

  우르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찻잔에 남은 잔향 같은 미소였다. 우르와 함께 있으면 편하고, 기운이 솟고, 명료해졌다.

  "쉬운 듯 보여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람은 몸을 가지고 있고 몸에 따라붙는 장애와 욕심이 있으니까요. 정신은 탁해지기 쉽고 이런저런 욕심에 매 순간 휘둘리지요."

  우르의 눈에는 아침인데도 하늘을 그으며 떨어지는 유성이 보였다.

  "태자님처럼 하늘의 초대를 받은 사람은 행운아입니다. 별과의 합일이란 얼마나 많은 조건들이 맞아떨어져야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맞아떨어짐이 일어난다면 어마어마한 힘이 생기는 거지요. 신명입니다. 필부들처럼 아예 순수한 마음으로 하늘의 뜻에 맡기든가, 아니면 태자님 같은 분이 많은 이들을 깨우쳐 하늘의 뜻을 알게 하는 거지요."

  우르가 담덕의 손을 잡았다.

  "잠깐 같이 가보시겠습니까?"

  우르의 몸에서 담덕에게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작게 시작한 떨림은 곧 온몸을 흔들고 심장을 터뜨릴 만큼 커져갔다.

  웅웅 -.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점이 보였다. 빛의 구멍이었다. 처음에는 작았지만 점점 커지는 빛의 구멍에 정신없이 빨려들어갔다. 순간 눈앞에 별들의 바다가 펼쳐졌다. 무한한 검은 공간, 적요한 공간에 희끄무레한 기운이 지나가고 밝은 기운이 보였다. 크고 작은 별이 떠 있고 기운이 흐르는 별천지였다. 검은 공간이지만 느낌은 더할 나위 없이 투명하고 명랑했다. 자신이 떠 있는지, 지켜보는 건지, 단순히 상을 떠올리는 건지 모호했다

  '저기 형혹성(화성)이 보이십니까?'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르의 말이 소리없이 전해졌다.

  '내가 마음을 읽은 건가.'

  눈앞에 시뻘겋게 달구어진 엄청나게 커다란 광구光球가 보였다. 지글지글하는 거대한 화로에서 막 꺼낸 듯, 광구 표면에서 이글거리는 붉은 기운이 솟구쳤다. 몽땅 타서 녹아버릴 것 같은데 담덕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불화산처럼 광구는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불꽃을 내뿜었다.

  '저게 형혹성이라니.' 

  위험하지만 지극히 아름답고 묘한 그 속으로 날아 들어가고 싶었다.

  "형혹성의 기운을 제대로 받으면 명석해집니다. 태자님은 더할 나위 없이 크게 그 기운을 받으셨습니다. 천복을 받은 분입니다아 -.'

  말은 메아리치다 사라졌고 담덕은 형혹성의 압도적 장관에 넋을 잃고  빨려들었다.

  '진성(辰星, 수성)은 어떻습니까. 그 기운을 받지 못하면 겨울에는 추워서 덜덜 떨고 여름에는 더워서 살맛이 안 나지요. 손과 발도 차고요. 이렇게 수많은 별들의 기운을 잘 받아야 사람으로서 제구실을 하고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별뿐이 아니라 온통 기의 바다라 할 수 있어서 좋은 기도 있고 사악한 기도 있습니다. 그 좋고 나쁜 기운이 사람에게 나타나 묘술을 부리지요. 흥망성쇠도 거기에 달렸고요.'

  '그걸 가려내기도 쉽진 않겠지.'

  '하늘의 별들이 돕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지요. 별들의 가호가 있으면 어떤 일도 창대하게 해낼 수 있습니다.'

  담덕은 다시 형혹성의 장관과 별의 바다로 눈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이루던 몸은 온데간데없고 신명神明만 점점 커져갔다. (p.180-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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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소설『광개토태왕 1/ 2017. 6. 27. <마음서재> 펴냄

  * 손정미/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1999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문화부, 사회부, 정치부, 산업부 기자로 20년간 활동했다, 사회부 경찰 출입 기자로 사건 · 사고 현장을 취재했으며, 조선일보 첫 정치부 여기자로 여야 정당을 출입했다. 문학 담당 기자 시절 고 박경리 선생으로부터 소설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았고, 2012년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소설가가 되기 위해 신문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2년 뒤, 삼국통일 직전의 경주를 무대로 한 첫 역사소설 『왕경 王京』을 발표했다.

  2015년부터 고구려의 위대한 영웅이자 세계사적으로 거대한 족적을 남긴 광개토태왕을 심도 있게 연구했다. 모래밭에서 사금을 찾는 심정으로 빈약한 사료를 하나씩 구해 찾고 전문가들을 만났다. 또 광개토태왕의 흔적을 찾아 중국 집안과 심양, 갈석산 등을 답사했다. 상고사를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고구려와 교류가 활발했던 실크로드를 훑고 중앙아시아를 지나 이란의 이스파한까지 찾아갔다. 여러 차례 답사와 고증,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완성한 역작이 역사소설 『광개토태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