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수선화 편지 · 32/ 상희구

검지 정숙자 2024. 7. 4. 02:24

 

    수선화 편지 · 32

         시멘트 콘크리트 육교 난간을 비집고 솟아오른 민들레 한 송이

 

     상희구

 

 

  무심코 육교 계단을 황급히 오르는데 시멘트 콘크리트 육교 난간 틈새를 비집고 솟아오른 가녀린 민들레꽃 한 송이를 만났습니다. 척박한 환경이라 그런지 피다만 아기 꽃송이는 기진맥진 그대로였습니다. 갑자기 한 생명에 대한 거룩한 외경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급히 생수병을 꺼내, 한 모금 불을 아기 민들레 조그마한 얼굴에 손바닥으로 살짝 머금어주었습니다.

 

  "잘 커려무나, 아기야."

      -전문-

 

  후기> 타고난 예술가 누에 이야기(전문)_저자

  누에는 누에나방과에 속하는 누에나방의 유충이다. 하등동물에 속하는 곤충이다 보니,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아 생김새는 초현질적으로 생겼다. 좀 유머러스하게도 보이는데, 징그럽다는 아이도 있으나 귀엽게 생겼다는 아이도 있다.

  누에는 성정이 까탈스러워 기르기가 쉽지 않다. 누에는 자신의 거처인 고치를 만들기 위해 고치실을 토해내는데, 이것이 바로 인류가 애용해 마지않는 실크, 곧 비단의 원료가 된다.

  누에는 천성이 예술가의 기질을 타고 난 것 같다. 까탈스러운 성정도, 초현실적인 생김새도 그렇다. 약 60시간에 걸쳐 중량 2.5그램, 길이 1,500미터에 이르는 고치실을 뽑는데, 고개를 수시로 상하로 주억거리며 실을 토해내는 과정은 가히 무위無爲에 가깝다.

  땅콩 모양의 고치는 가장 작은 체적에 가장 많은 실을 감을 수 있으며, 실이 쉽게 풀어지지 않고 견고하게 감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모든 설계는 이미 만세萬世 전에 하늘의 예지叡智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누에의 이런 행동거지야말로 진정 하늘에서 내린 예술이며, 천의무봉天衣無縫, 무위의 예술 활동으로 인간이 배워두어야 할 진정한 예술행위일 것이다.

  예술이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술에 힘이 들어가면 거기서 억지 예술이 나오고, 얼치기 사이비 예술이 기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추사秋史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 봉은사에 남겼다는 '판전版殿'이라는 현판은 그 심성이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로 돌아가 쓴 글씨라고 일컬어진다. 예술의 궁극이 바로 돌아가 쓴 글씨라고 일컬어진다. 예술의 궁극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오늘도 어제도 누에는 연신 머리를 주억거리며 고치실을 토해내는데, 일정한 계산도 없고 미래의 계획도 없이 그냥 하늘이 시킨 대로 하는 것뿐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말은 도가道家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에를 닮은 진정한 사람의 예술을 꿈꾸어 본다. (p. 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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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수선화 편지』에서/ 2024. 6. 25.  <오성문화> 펴냄

 * 상희구/ 1942년 대구 출생, 1987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첫 시집『발해기행』, 시집『요하의 달』『숟가락』, 대구연작장시『대구』(제1집) 『추석날대목장날』『노곡동 징검다리 』『권투선수 정복수』『개살이 똑똑 듣는다』『대구시지』(상권, 대구 1~5권까지 망라함), 『동화사 부도암의 홍매법문』『신발 거꾸로 신고 나온 시에미』『오솔길 끝에 막은안창집에는 할매 혼자 산다』『애조글재조글 잔소리만 해쌓는 우리 시누이야』(연작장시『대구시지』 제1집~10집『팔공산』까지 완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