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거미줄 외 1편/ 박재화

검지 정숙자 2024. 7. 6. 02:36

 

    거미줄 외 1편

 

     박재화

 

 

  밤 산책로 얼마쯤 어둠에 잠겼다가 저쪽 아파트 불빛 따라 트이기도 합니다 날마다 찾지만 같은 듯 다른 공기 숲냄새 살아 있어 좋습니다 다만 얼굴 스치고 떨어지는 거미줄에 가슴 싸아합니다 그의 무척이나 힘들었을 노역을 이리 쉬 허물다니···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그러면서 한편 의아합니다 여기 무슨 날것들 있다고 거미줄 치나? 아파트 들어서면 사람들 몰려오면 얼른 물러나야 하지 않나? 사람 무서운 줄 모르다니 참 바보 같습니다 어구나 그처럼 하릴없는 기다림이라니! 이젠 기다리지만 말고 여섯뿔가시거미처럼 먹이 찾아 나서라 권하고픈 밤입니다 

 

  꽤 오래 무시무시한 소리에 먼지 대단하더니 숲이 사라졌습니다 때없이 사람들 나타나고 밤도 예같지 않습니다 조금 남은 나무들 풀들 사이 파리한 가로등 나방이 부르는 밤 힘들게 실을 뽑아도 무슨 까닭인지 쉬 망가져버리고 먹이도 전만 못합니다 아무래도 내가 살던 곳이 아닌가 봅니다 그렇더라도 사람 무서운 줄 알라니 무슨 말인지요? 무서움은 죽음을 무기로 하는 것인데··· 난 죽음 같은 거 모릅니다 영원도 찰나도 모릅니다오롯이 기다림만 아는 이 삶은 그래도 하늘이 주신 겁니다 그러는 당신은 기다림을 아시나요 아니 기다려보긴 했나요?

    -전문(p. 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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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번호를 잊다

 

 

  내게 무슨 비밀 있다고 비밀번호를 만들라니 아내가 나보다 더 나를 잘 알 정돈데 비밀은 무슨··· 그러나 비밀번호 없으면 현관도 못 열고 돈도 못 찾고 이메일도 못 본다 오나가나 비밀번호다 그런데 비밀번호가 바뀌어야 한단다 바꾸지 않으면 혼난다 자주 바꾸라고 호통까지! 뭐라? 잦추 변경하라고? 바뀌면 그게 무슨 비밀인가 오래오래 변치 않는 게 비밀 아닌가? 그래도 바꾸란다 아무튼 바꾸란다 바꾸지 않으면 내가 바뀔 것 같다 하, 이거야 원··· 때없이 바꿔야 하는 비밀번호 앞에 한참을 갸웃하다 그예 돌아서는······

     -전문(p.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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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비밀번호를 잊다』에서/ 2021. 6. 15. <인간과문학사> 펴냄

박재화/ 1951년 충북 보은 출생, 1984년 『현대문학』 2회 추천완료로 등단, 시집『도시都市의 말』『우리 깊은 세상』『전갈의 노래』『먼지가 아름답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