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해적 방송/ 최백규

검지 정숙자 2019. 11. 14. 23:06

 

    해적 방송

 

    최백규

 

 

  이제 우리는 서로의 이방인이다

 

  희고 뜨거운 밥상을 수백 번 물릴 때까지 한 줄도 그대를 잊지 못했다

 

  지구로 향하던 운석이 환하게 흩어지고

  가족을 가진 인간들이 집으로 파한 이후의 광장이 있다

  후드를 입고 슈퍼스타 밑창이 닳아가도록 보드가 아스팔트를 갈랐다 청바지에 손을 숨긴 채

  도로 끝을 바라보았다

 

  양치를 하고

  외투를 벽에 걸고서 유난히 하얗던 지난여름의 일들을 생각하며 식료품을 정리하다가

 

  의자에 앉아 느리게 연필을 깎는다

 

  안다 머리를 묶지 않는 그대의 귀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쉽게 죄를 짓던 손으로 블록을 조립하고

  합정역에서 상수역까지 걸었다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지인과 연락을 끊고 모르는 사람을 용서하고

  조용히 야위어가며

  식은 바닥에서 잠을 자다가 눈이 떠지면 일어나서 산다

 

  이른 날에는 익숙한 병을 우두커니 앓고 있는 나를 누군가 보살펴 주었다

 

  숨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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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토피아』2019-가을호 <신작시>에서

  * 최백규/ 2014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창작 동인 <뿔>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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