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밤의 해변은 끝없이▼/ 오정국

검지 정숙자 2024. 9. 20. 02:52

 

    밤의 해변은 끝없이

 

     오정국

 

 

  멀어지면서 저무는 뒷모습

  밤의 해변은

  멀거나 가깝고

 

  수평선에 넋을 놓다가 파도 한 줄

  노을빛으로 울먹이다가 파도 한 움큼

  새벽 바다 어선의 불빛에게도 파도 한 자락

 

  밀려오고 쓸려가는 무한반복의 굴굽이가

  무너지고 멈춰 설 때

  비로소 홀로임을 깨닫는 모래알들

 

  제본되지 않는 모래의 책이 사방에 널려 있다

  닭 뼈다귀 개뼈다귀 사람 뼈다귀가 굴러다닌다

  텅 빈 모래밭에서

  희고 검은 돌멩이의 시계판 위에서

  발끝에서 물밑에서

 

  물결은 겹쳐져서 출렁이지만

  제각각의 찰나 속으로 사라진다

 

  폭죽이 솟는다 허공에서 꽃피는 불꽃의 아우성

  캄캄하게 메아리치는 겹겹의 구멍들

  저 상처를 어찌하랴 싶지만

  밤의 해변은

  끝없이

 

  널빤지와 신발짝과 폐타이어와 함께

  헛딛지 않고선 돌이킬 수 없는 발자국과 함께 

     -전문(p. 30-31)

 

   ※ 제목 끝에 [] 표시가 된 작품은 시인들이 직접 뽑은 1~2년 내의 근작대표시입니다. 이 작품은 현대시 작품상 후보작으로 검토됩니다.  

 

  ♣ 시작 노트 : 한적한 바닷가에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어촌마을 언덕에 집 한 칸을 얻었다. 바닷가를 걸었고, 모래밭에 앉아서 밤낚시를 했다. 그 일상을 시로 써 보았다. 책을 읽거나 문장을 이어가다가 잠들면, 꿈속에서 파도가 일렁거렸고 문장들이 떠다녔다.

  새벽녘엔 이마가 시렸다. 밤샘 어선들이 포구로 돌아오고 있었다. 수평선 저편에서 밀려오는 파도는 영원과 찰나, 현재와 과거, 지속과 단절, 삶과 죽음의 생생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거침없이 뒤섞여서 엇갈리는 물굽이들. 그 심연 앞에선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데, 나도 모르게 중얼대곤 했다.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는가? 책상 위의 백지에 내 존재의 존재성에 대한 질문을 담아보고 싶었다. (p.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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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4-8월(416)호 <신작특집> 에서

  * 오정국/ 198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