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신동옥_메시지 없음(발췌)/ 격자 창문 안쪽에 무엇이 있으면 좋을까 : 권현형

검지 정숙자 2024. 9. 13. 18:16

 

    격자 창문 안쪽에 무엇이 있으면 좋을까

 

     권현형

 

 

  내가 기른 비, 내가 기른 햇볕

  달콤한 야생 열매가 잔뜩 들어 있길 바란다

  격자 창문 안쪽에는 죽은 액자나 말린 꽃에 대한

  에칭보다는 한 그루 나무가 서 있길 바란다

 

  단것이 필요한 날에는

  햇볕을 따라 걷는 게 좋다

  올리브나무를 화분에 기르고 있는 마카롱 가게 앞을

  지나다니는 게 유일한 행복인 날도 있다

  올리브나무와 마카롱 가게가 앱 지도에

  좌표로 있다면 잠시 행복 비슷한 상태가 될 수 있다

 

  마카롱 가게의 낡은 소파를 흰 옥양목 천으로

  덮어씌운 순간 흰색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흰색 천 커버는 낡은 삶을 뒤집어씌울 때도 있고

  죽음을 덮어씌울 때도 있다

  행복을 망상하며 햇볕을 따라 걸어 본다

 

  막다른 구석, 막다른 삶의 안쪽에는

  햇볕을 플라스틱 집게로 겨우 집어 날아가지 않게

  빨랫줄에 걸어 놓고  있다

  젖은 행주가 햇볕을 간신히 붙들고 있다

 

  빛이 부족한 골목 안쪽까지 걸어 들어와서는

  내가 누구인지 잊은 채 악인인지 선인인지 잊은 채

  햇볕의 공평, 햇볕의 분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 짧은 산책의 정점은 조명 가게 앞에 있는

  뉴턴의 사과나무와의 조우, 내일 파멸한다 해도

  커다란 화분에 심어 놓은 사과나무는 힘껏 생을 사랑하고 있다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사과나무의 애착을 내 머리에 옮겨 심는다

 

  사과나무는 화분을 뚫고 나가 땅의 일부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땅을 망상하고 몽상하는 힘으로 살아갈 것이다 

     -전문, 『녹색평론』(2024-봄)

 

  메시지 없음(발췌) _신동옥/ 시인

   '나날의 작은 행복에 대해' 써 내려간 시를 이끌어 가는 힘은 "망상하고 몽상하는 힘"이다. 거리에 서서도 "격자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이미지, 형언할 수 없는 빛깔을 뽐내다가 곧 시들어가는 잎사귀 꽃잎 앞에서 액자 프레임 안과 밖을 떠올려 보는 단속감斷續感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사유의 시인답게 격자로 인해 존재하는 현실의 이면에 대한 직관은 이내 삶과 죽음이나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옮아가지만, 시인은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 그 자체'로 날렵하게 되돌린다. 이처럼 시를 이끌어 가는 이야기는 내러티브의 총체화 과정을 의도적으로 배반하면서 시 그 자체의 형식을 완결하고 이미지를 구제한다.

  시적 기능은 메시지가 아니라 메시지가 되어 가는 과정을 드러내는 발화라는 야콥슨의 오래된 금언이 다시 떠오른다. 시에 가로놓인 이야기의 속성은 무엇인가? 김인환에 따르면 아도르노의 '에세이론'은 데카르트적 코기토에 대한 항의의 의미에서 출발한다. ① 에세이는 명석판명한 인식을 전제하지 않는다. ② 에세이는 전체가 아니라 부분을 강조하며, 진리가 아니라 지금-여기를 존중한다. ③ 에세이는 감각적 관점에서 출발하며 경험의 모호성을 추인하고 앙양한다. ④ 에세이는 누락, 생략, 비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적 구체성을 밑바대가 되는 이야기가 에세이적인 특성을 띤다고 함은 이러한 의미에서 균열 속에서 균열의 틈을 응시하고, 거기서 배가되는 이미지의 사유와 근사하다.

  에세이의 미학에 비추어 보자면 메시지와 개념의 전달, 강조를 통해 단일한 결론을 향해 이끌어 가는 개괄적인 사유는 '천박하고 단순한 모델'로 치부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무수한 균열을 매끈한 개념 체계로 덮어 가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관점의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시적 구조에 도사리는 이야기는 에세이적인 특질을 모호성을 기제로 공유한다. 그것은 메시지와 결론을 향해 가는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획일화된 관점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다. (p. 시 147/ 론14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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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파란』 2024-여름(33)호 <quarterly review> 에서    

  * 권현형/ 강원 주문진 출생,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중독성 슬픔』『밥이나 먹자, 꽃아』『아마도 빛은 위로  

  * 신동옥/ 시인, 2001년『시와반시』를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악고, 아나키스트 기타』『웃고 춤추고 여룸하라』고래가 되는 꿈』『밤이 계속될 거야』『달나라의 장난 리부트 『앙코르』, 산문집『서정적 게으름』, 시론집『기억해 봐, 마지막으로 시인이었던 것이 언제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