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마음의 고향 · 6/ 이시영

검지 정숙자 2023. 8. 16. 02:55

<1996, 제8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작>

 

    마음의 고향 · 6

 

    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 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전문(p. 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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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35회 지용제 사화집 『어머니 범종소리』/ 2022. 9. 14. <옥천군· 옥천문화원· 지용회> 펴냄. (비매품) 

  * 이시영/ 1949년 전남 구례 출생, 1969년⟪중앙일보⟫에 시조가, 『월간문학』신인작품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만월』바람 속으로』『길은 멀다 친구여』『이슬 맺힌 노래』『무늬』『사이』『조용한 푸른 하늘』『은빛 호각』『바다 호수』『아르갈의 향기』『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호야네 말』등 열세 권, 시선집『긴 노래, 짧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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