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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정하해

금산사      정하해    너를 찾으러 천 리를 오니 눈물이 난다  영영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봐   구척장신인 미륵존불 앞에서  절 하나에 너를, 절 두 번에 또 너를   우리가 헤어진 것도 없으니 달리 찾을 방법도 없지만   법당 앞을 지키는  꽃무릇들과   오 층 석탑에 올라서니 해가 기울고 있다  용화세계였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미래에 사바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가 바로 미륵불이다. 화자는 금산사 미륵불 앞에서 절을 할 때의 감회를 적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미륵불 신앙이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되어왔다. 56억 7천만 년 후에 나타난다는 숫자 역시 상징적이다. 그때 이 세계는 이상적으로 바뀌어 땅은 깨끗하며 꽃과 향기로 가득하다고 한다...

정오의 산책/ 류미야

정오의 산책      류미야    풀리는 2월 천변은 생각으로 이어지고  풀지 못한 물음은 그림자로 길어진다  가슴속 묻은 말들이  봄꿈처럼 흐느끼는 곁,   결빙의 계절에서 살아 돌아온 왜가리  꼼짝없는 수심에 발목을 붙들린 채  마지막 남은 한 발을 총구처럼 장전했다   답 없는 도심에 존재의 닻을 내리고  왜? 라는 회의를 제 이름에 새긴,  물주름 환할 때까지 들여다보는  저 골몰   저린 물음들만이 생을 구원한다고  최후의 만찬 같은 한 끼 식사를 보며  풀리는 겨울 천변을  되짚어오는 한낮    -전문(p. 128-129)   --------------------- * 『시인하우스』 2024-상반기(창간)호 2부> 에서 * 류미야/ 2015년『유심』으로 등단, 시집『눈먼 말의 해변』『아름다운..

대림역/ 김윤

대림역     김윤   콸콸 흘러가는  버드나무 개울 옆에 살았지요  연길서는  내가 조선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서  중국 사람인 걸 알았어요   가정집에서 애를 봅니다  아이는 나하고는 연변 사투리를 써요  저녁에 제 엄마가 오면  서울말을 쓰지요  내 아들은  지린성에 두고 왔어요  아들은 내년에 서울 올 거요  고향이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힘들고 서러우면  대림역에 가요  골목 들어서면  양꼬치 굽는 냄새가 나요  쇠갈고리마다  말린 양고기가 걸려 있어요  중국 꽈배기를 파는 춘희 씨 노점을 지나   해란강 돌솥밥 지나서 골목 끝에   먼저 온 사촌이 지하 방을 얻었어요  주말에 고향 음식 해 먹고  밀린 잠을 잡니다  부르하통하 강가에  넋을 잃고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찾아..

생명파_인간성을 옹호하고 생명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박현솔

생명파_인간성을 옹호하고 생명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박현솔    * 송덕비는 예로부터 어진 정치를 펼친 관료의 공을 기리기 위해서 세우는 비석이다. 인간의 업적을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부피가 커진 송덕비에서부터 부피가 작은 송덕비까지 다양한 송덕비를 세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송덕비가 백성들이 주는 상의 의미가 큰 것인데 오늘날의 관료들은 자신의 부와 명예로 송덕비를 세워 후대에 기리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에 국민들이 청원해서, 단체에서 추천해서 그 사람의 업적이 세상에 드러나기보다 개인의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송덕비는 아무리 크고 높아도 참다운 의미가 없는 것이다. (p. 50..

한 줄 노트 2024.06.01

박현솔 시론집 『초월적 세계인식의 전망과 이데아』/ 분홍신을 신고 : 나희덕

분홍신을 신고      나희덕    음악에 몸을 맡기자  두 발이 미끄러져 시간을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내 안에서 풀려나온 실은  술술술술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흘러갔지요  춤추는 발이  빵집을 지나 세탁소를 지나 공원을 지나 동사무소를 지나  당신의 식탁과 침대를 지나 무덤을 지나 풀밭을 지나  돌아오지 않아요 멈추지 않아요  누군가 나에게 계속 춤추라고 외쳤죠  두 다리를 잘린다 해도  음악에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있다니,  그것도 나에게 꼭 맞는 분홍신을 신고 말이에요  당신에게도 들리나요?  둑을 넘는 물소리, 핏속을 흐르는 노랫소리,  나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강물이 둑을 넘어 흘러내리듯  내 속의 실타래가 한없이 풀려나와요  실들이 뒤엉키고 길들이 뒤엉키고  이 도시가 나를 잡으려고..

박현솔 시론집 『초월적 세계인식의 전망과 이데아』/ 대문 : 장석남

대문      장석남    이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자가 너무 많다  이 문으로 들어설 수 없는 자가 너무 많다  이 문으로 들어오고 싶지 않은 자가 너무 많다   한때 나의 집 대문은  다알리아 같은 것이었고  줄 끊겨 날아간 방패연 같은 것이었고  시들시들한 고추모 같은 것이었고  찔레덩굴 같은 것이었고  등잔불 같은 것이었다  꽃 같은 것이었고  바위 같은 것이었다  원元코 형亨코 이利코 정貞코······  고전을 따라서 네 귀마다 하늘을 매달아도  이 대문을 나서는 데가 결코 사랑 같지 않다  사랑이 결락된 이 대문을 어떻게 호랑이는 찾아왔던 것일까   다시 호랑이가 대문간 지붕에 배를 깔고 앉아 있어도 나는 놀라지 않을 작정이다  한바탕 소나기같이 지나간 호랑이여    나의 집 대문간 지붕에 ..

어떤 방백(傍白)/ 박재화

어떤 방백傍白      박재화    어화, 사람들아 이 내 사연 들어보소  그대들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도로가1)에 잠든 내가  평강공주 덕에 벼락출세한 걸로 알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말씀  이 온달溫達이 일천오백 년간 고구려인들의2) 가슴에  살아남은 건 그런 까닭이 아니외다   돌아보면,  고구려 22대 안장왕3)은 백제 한 씨 미녀와 염문을 뿌리더니 시해당하고,   그 동생 23대 안원왕安原王 때엔 후사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천 명이나 죽었으며4),  맏아들 24대 양원왕陽原王은 국내성파의 반란5)을 간신히 진압하였으나 그만 한강 유역을 잃고,  그 맏아들 25대 평원왕은 왕궁을 옮기면서까지6) 집권파인 상부 세력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하려던 중이었소  이처럼 오래 나라가 어지러우니 5..

몽촌(夢村)/ 나금숙

몽촌夢村         희토류 도시광산     나금숙    타인이 원하는 내가 되는 것을 고민하지 않는 새들은 굴뚝 속으로나 하늘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간다 나는 그게 항상 어려워! 답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늘 익숙지 않네 신이면서 사람인 그를 잉태한 한 여인을 만날 때 엘리사벳은 태동을 느꼈지 그이를 만날 때 나도 그게 가능할까 섬을 건너다니는 새들도 어느 섬에서는 가슴이 뛸까   희토류 도시광산에 대해 들을 때 귀가 즐거웠어 폐가전을 모아 희유금속을 캐낸다면 너와 내 속의 구질구질한 슬픔 속에 재생 가능한 기쁨도? 버려진 물건이 태동을 한다면 석면 가슴도 다시 울렁일 수 있겠지   성문 밖 불당리 적설에 쓰러진 소나무에 균사체가 피어나더군 먹이를 찾아 유기견은 웅덩이에서 혀만 축이다가 석양 숲으로 사라졌..

늪/ 김혜천

늪     김혜천    화사한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일으키던 거울이  사금파리로 흩어지고   봄은 아직 결빙을 품고 있다   귀에 포진한 대상이  안면을 강타한 후  얼굴에 동거를 시작한 삶과 죽음   경계에서 흔들리다가도  허들을 딛고 뛰어넘던 사고체계도  잘 따라오던 영혼도 눈보라에 길을 잃었다   빙자옥질氷姿玉質이고 싶던 소망 실종되고  아치고절雅致高節도 아득한 절벽 되었다   복원을 위한 몸부림  하데스보다 차고 어두운 늪   가장 아끼던 것을 허문 이여  눈 한번 깜박이는 것이 기적임을   외롭다 여기던 길들이  보석함 열리는 길임을 알게 하려고  연단을 거듭하는 이여   천수 천안으로 슬픈 체온 어루만져  화사한 웃음으로 부추기는 이여     -전문(p. 116-117)   ----------..

사하라의 그림자/ 김추인

사하라의 그림자         homo commons*     김추인    늪과 강과 바다가 모이던 사하라는 신의 정원   초목이 무성했던 대초원의 고대 사하라는  기록 속에 묻히고  이제는 숲도 바다도 사라진  모래 폭풍 몰아치는 바람의 땅  놀랍도록 아름다운 사구들 아래 묻혔을  목숨들의 문명을 떠올려 봅니다   모래 아래 숨어 있을 오아시스의 흔적도 물밑 화석도 큰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 코끼리, 가젤, 기린 등속의 족속들 땅이었을 여기  옛 풍요의 서사를 추억하듯 바람의 현을 당겨 읊조리는 모래의 노래를 듣습니다   지구별의 기울기가 바뀌면서 푸른 사하라는  불볕의 사막이 되었습니다  가끔 살아있는 화석처럼 그림자처럼  언뜻언뜻 지나가는 터번 두른 이는  투아레그족이거나 베두인이겠거니 짐작하며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