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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1/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1      정숙자    어느 하루를 위해 살아야 한다면 먼 후일이 아닌 오늘을 위해 서 있겠습니다. 삶을 일깨우는 길은 일 초 일 순 지성을 다하는 것뿐이라고 자신에게 일러줍니다. 오늘인즉 한 틈새 풀꽃일 테니까요. 얼핏 헛디딘 한 걸음이 일껏 ᄊᆞᇂ은 탑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을 거니까요. 오늘은 오늘 하루의 과제이기보다 전 생애가 걸린 난제가 아닐까요? (1990. 10. 9.)               문득 ‘외로운 나그네’란 어휘가 스친다  칫솔 치약을 손에 든 순간  거울 속 나에게   누가 보낸 메시지일까?   ‘외로운 나그네’  이거 나에게만 와 닿은 파동일까?   혹, 전 인류 앞에 동시 발송된 파장일까?   한두 뼘 더 나아가 종種을 초월한 명제일까?   아차,..

지켜지지 못한 약속/ 백무산

지켜지지 못한 약속      백무산    그 약속이 지켜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세월이 까마득 흐른 뒤에 그 사실을 알고  감전된 듯 눈앞에 번쩍 그려지던 그 길   열아홉 살, 모든 것이 시작되던 나이  우린 모두 어디론가 떠나야만 했던 나이  멀리서 내게 연락을 주기로 한 곳이 있었지  모두 부러워하던 그곳  하지만 나는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전화가 있는 친구에게 부탁을 하고 동해남부선을 탔지  남포가 터지고 철골들이 비명을 지르고  쇳가루 먼지 두껍게 뒤덮던 바닷가 철강공단으로   소식은 오지 않았고 친구는 떠나고 없고  그리고 모든 걸 잊었네 까맣게 잊어버린 일  사십 년도 더 지난 뒤에 알게 되었다네  내게 연락 않고 그 친구가 대신 갔다는 사실을  나는 청량리행 완행열차를 타기로 되어 있..

느릅나무/ 임승빈

느릅나무      임승빈    겨울 호숫가, 느릅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래서 느릅나무는 겨울 호숫가 느릅나무가 되었다  어느 날부터 청둥오리 몇 마리가 날아와 물살을 가르며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다 그래서 느릅나무는 어느 날부터 청둥오리 몇 마리가 날아와 물살을 가르며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는 겨울 호숫가 느릅니무가 되었다  밤이면 한쪽으로 호수가 얼고 바람도 겨울답게 매서워지곤 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청둥오리 몇 마리가 날아와 물살을 가르며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는 겨울 호숫가 느릅나무는 매서운 겨울바람에 가끔 가지가 더 크게 흔들리곤 했다  오늘은 초저녁부터 달이 올랐다 아직은 다 차지 않은 쪽달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청둥오리 몇 마리가 날아와 물살을 가르며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는, 밤이면 한쪽..

뛰어라, 반가사유/ 윤경재

뛰어라, 반가사유         마라톤을 하는 시각장애우      윤경재    밑줄 친 두 호흡이  열두 줄 가야금 산조에 맞춰 달리고 있다   먼 저곳 사유의 길을 향해  앉음과 섬, 그리고 그 중간의 반가에  모든 게 달렸다는 듯  차마 실눈 뜨고 바라보는 뭇 숨소리도  두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인다  여러 천 년 동안 이별하여 지냈던  손목의 맥동이 만나 기뻐 뛸 때  둘 사이를 엮은 노란 리본이  펄럭펄럭 춤을 춘다   반 발짝쯤 앞서가는 육신의 신호등  뒤를 밀어 올리는 마음의 눈을 따라야 한다   누가 누구를 이끌며 가는 마라톤인지  서로 의지하는 투명 끈이  오르락내리락 마음들을 단단히 묶어준다   이곳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분 반가사유상의 깊은 공명     -전문(p..

샘/ 신원철

샘      신원철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히말라야 깊은 산속 가릉빈가 새  청청 수려하다는 그 목청.  강화도 보문사 사시예불, 독경하는 젊은 스님의  샘물 같은 목소리가 꼭 그랬지요  그때 나는 대웅전 앞 큰 느티나무 아래 벌렁 드러누워  "아이고 이놈의 절 올라오는 언덕길이 장난 아니네!"  투덜대면서  팔락팔락 나부끼는 잎사귀 사이로  슬쩍슬쩍 엿보이는 흰 구름에게 그 마음을  가만히 내맡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쪽저쪽 처마들이 댕그렁 댕그렁  한 소리 시작하는 거예요  스님도  목탁을 놓고 요령을 흔들기 시작했어요  쨍그렁쨍, 댕그렁댕, 쨍쨍, 댕댕······  이 소리 저 소리 한가운데서  나무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지요  이렇게 수선스러운 절집은 처음이었지만  마음은 퐁퐁 솟아오르고 ..

축배를 하늘 높이 들지어다* 외 1편/ 심은섭

축배를 하늘 높이 들지어다* 외 1편         강원특별자치도 출범에 즈음하여           심은섭    곡선으로 된 옷깃의 옷을 입고 살았던 예맥 사람들의 땅   산천마다 경계를 짓고, 이웃끼리 서로 간섭하지 않고 사는  300만 예맥의 얼굴들,  그들은 좀생이별자리로 풍년을 점치며 사슴처럼 살았으며  태백산맥을 가슴에 품고 천년을 살아온, 이 같은  예맥의 사람들을 귀히 여기시던 조물주께서  강원특별자치도 출범의 복을 내리셨으니, 이젠 이 옥토에   설악산 정상으로 오색케이블카가 오르내리고  탄소중립 녹색성장 중점자치도가 될 것을 선언할지어다  늘 추위에 떨던  군사접경지역의 경제가 둥지의 새알처럼 부화를 하고  산림이용진흥지구제도가 금빛날개로 창공을 날며  절대농지구역이라는 차꼬와 수갑에서 ..

천마총엔 달이 뜨지 않는다/ 심은섭

천마총엔 달이 뜨지 않는다      심은섭    그곳에 가만히 내 몸을 뉘어본다 천정엔 물병자리 별빛이 한가롭다 벽화엔 살구나무가 산모처럼 몸을 푼다   주인을 잃은 천마는 천상을 호령하며 자작나무 껍질 위로 말발굽을 내딛지만 돌무지 널 속 왕관은 깊은 잠에 취해있다   굴삭기가 동굴의 옆구리를 찍어도 해머가 목관 속의 침묵을 으깨어도 성골인 까닭으로 그는 깨어날 수 없다   시간을 살해해야 살아남는 역사는 결단코 뒤돌아보지 않는 표독한 습성을 지닌 한 마리의 맹수였다     -전문-    시론> 한 문장: 시는 어떤 주제를 노래하더라도 인간의 삶이 반영되어야 한다. 인간의 삶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체험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된다. 시는 이미 체험한 ..

설악산 흔들바위 외 1편/ 심은섭

설악산 흔들바위 외 1편      심은섭    밀고 밀어도 추락하지 않는다   의심을 잔뜩 품은 바람 한 점이 바위 속을 들여다보았다 흠칫 놀란 표정이다 그 바위 속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암자 한 채가 보이고, 수행 중인 고승도 보인다 고승은 언제부턴가 세상 밖을 거부하며 바위 속으로 타고 들어갔던 사다리마저 부숴 버리고 산다 봄날, 그는 꽃들이 찾아와 바위를 흔들 때마다 터진 영혼을 수선하며 목어를 두드린다 꽃이여, 바람이여, 더는 저 바위를 흔들지 마라 저 바위를 흔들수록   너만 더 흔들릴 뿐이다      -전문(p. 45)     --------------------------------    수신하지 않는 e메일    창밖엔  달이 떠오르고  내 기억의 언덕으로 두 얼굴이 떠오른다   천상에 계..

물의 발톱/ 심은섭

물의 발톱      심은섭    달에서 지구의 플라스틱 병이 발견되었다  그 사실을 지구를 향해 황급히 타전했으나   인류가 벌집의 애벌레를 털어 먹었고, 피조개가 소유했던 갯벌을 갈아엎고 세운, 공장 굴뚝의 연기를 들이마신 나팔꽃이 성대결절로 나팔을 불지 못해 새벽을 불러올 수 없다는 것이다 산속 벌목공들의 톱질 소리에 숲들이 원형탈모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산새들이 또 신문사에 제보했으나 입에 거품을 물고 쓴 기사 하나 없다   신문을 읽던 빗방울들이 치를 떨며 강가에 모여 완강한 쇠사슬의 스크랩을 짜고 황톳빛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발톱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 발톱으로 지상의 모든 길을 집어삼켰다 겁에 질린 어떤 나무는 겨울에 붉은 꽃을 피웠다 종족 번식을 위해 여름밤과 협상하던 달맞이꽃의 생..

나스카, 마추픽추, 우유니, 아 - 그리고 파타고니아/ 김추인

나스카, 마추픽추, 우유니, 아    그리고 파타고니아      김추인    * 얼마나 꿈꾸던 남미인가, 멀어서도 못 갔고 비싸서도 못 갔던 지구 반대편에 대한 구름장 같은 그리움 하나 가슴 속에 심어둔 지 30년이다. 미역가닥만 같이 길다란 칠레며 시인 네루다의 마추픽추, 나스카라인, 우유니소금사막 등 이것들을 만나야했다. 또 마야, 에콰돌, 볼리비아, 호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세계 곳곳의 고대인(과학적 탄소연대측정)들이 남긴 벽화 속, 신기루만 같은 외계인 형상들, 이것들이 외계인 개입된 일이 아니라면 분명 우리 지구행성의 조상은 현재의 우리보다 훨씬 우등하고 문명했을 것이란 수수께끼를 품지 않을 수 없었던 것. (p. 22)   * 고집스럽게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광기狂氣의 사람들, 어..

한 줄 노트 2024.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