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박현솔 시론집 『초월적 세계인식의 전망과 이데아』/ 분홍신을 신고 : 나희덕

검지 정숙자 2024. 6. 1. 13:24

 

    분홍신을 신고

 

     나희덕

 

 

  음악에 몸을 맡기자

  두 발이 미끄러져 시간을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내 안에서 풀려나온 실은

  술술술술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흘러갔지요

  춤추는 발이

  빵집을 지나 세탁소를 지나 공원을 지나 동사무소를 지나

  당신의 식탁과 침대를 지나 무덤을 지나 풀밭을 지나

  돌아오지 않아요 멈추지 않아요

  누군가 나에게 계속 춤추라고 외쳤죠

  두 다리를 잘린다 해도

  음악에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있다니,

  그것도 나에게 꼭 맞는 분홍신을 신고 말이에요

  당신에게도 들리나요?

  둑을 넘는 물소리, 핏속을 흐르는 노랫소리,

  나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강물이 둑을 넘어 흘러내리듯

  내 속의 실타래가 한없이 풀려나와요

  실들이 뒤엉키고 길들이 뒤엉키고

  이 도시가 나를 잡으려고 도끼를 들고 달려와도

  이제 춤을 멈출 수가 없어요

  내 발에 신겨진, 그러나 잠들어 있던

  분홍신 때문에

  그 잠이 너무도 길었기 때문에

     -전문-

 

 ◈ 사통의 감각과 여성성의 확장(부분)_ 박현솔/ 시인

 이 시는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에서 모티브를 가져오고 있는데, 한 가난한 소녀가 어머니가 죽은 후에 부잣집 할머니에게 입양된 이야기다. 평소에 소녀는 빨간 구두를 신는 것을 좋아했고 교회에 갈 때도 빨간 구두를 신어서 할머니에게 꾸중을 듣곤 한다. 이상하게 소녀가 빨간 구두를 신으면 저절로 춤을 추게 되고 가끔은 춤을 멈출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소녀는 빨간 구두를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더 자주 신고 나간다. 할머니가 병이 들어도 마을의 무도회장을 들락거리고 그 때문에 할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된다. 빨간 구두를 신은 소녀는 춤을 멈추고 싶었지만 소녀 앞에 나타난 천사는 계속 춤을 춰야 한다고 말한다. 소녀가 천사에게 자비를 구하고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빨간 구두는 또 어디론가 데려간다. 춤을 추는 게 너무 괴로웠던 소녀는 마을의 사형 집행인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발을 잘라달라고 부탁한다. 발을 자른 후에 사형 집행인은 소녀에게 나무로 만든 발과 목발 한 쌍을 내어준다. 그때서야 소녀는 잘못을 뉘우치고 경건한 생애를 보내며 구원을 받는다.

  동화의 원작과 이 시가 다른 것은 시간의식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원작이 춤의 연속성을 이어가기 위해서 공간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반면에 시에서는 공간의 변주와 함께 "시간"을 언급하고 있다. 즉 여성화자의 발에 신겨진 "분홍신"이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고 "그 잠이 너무도 길었기 때문에" "춤을 멈출 수가 없"다..

  그런데 왜 분홍신이 잠을 자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보가 제공되지 않고 "누군가 나에게 계속 춤추라고 외쳤"다고만 말하고 있다. 동화에서는 소녀가 교회에 갈 때 검정구두를 신어야 하며 그 규율을 깬 주인공을 할머니가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빨간 구두를 신고 교회를 가다가 만난 늙은 군인이 소녀의 신발 바닥을 두드리면서 춤을 출 때 소녀에게 단단히 붙어있도록 주문을 거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천사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서 계속 춤을 춰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볼 때 화자는 엄격한 규율과 잣대를 가진 종교제도가 오랫동안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고 속박해왔음을 제시하고 있다. (p. 시 29/ 론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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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솔 詩論集『초월적 세계인식의 전망과 이데아 에서/ 2023. 10. 5. <문학과사람> 펴냄

* 나희덕/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뿌리에게』『가능주의자』등

* 박현솔(본명, 박미경)/ 1970년 제주 성산 출생,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 2001년 『현대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 『달의 영토』『해바라기 신화』『번개와 벼락의 춤을 보았다』, 시론집 『한국현대시의 극적 특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