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백傍白
박재화
어화, 사람들아 이 내 사연 들어보소
그대들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도로가1)에 잠든 내가
평강공주 덕에 벼락출세한 걸로 알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말씀
이 온달溫達이 일천오백 년간 고구려인들의2) 가슴에
살아남은 건 그런 까닭이 아니외다
돌아보면,
고구려 22대 안장왕3)은 백제 한 씨 미녀와 염문을 뿌리더니 시해당하고,
그 동생 23대 안원왕安原王 때엔 후사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천 명이나 죽었으며4),
맏아들 24대 양원왕陽原王은 국내성파의 반란5)을 간신히 진압하였으나 그만 한강 유역을 잃고,
그 맏아들 25대 평원왕은 왕궁을 옮기면서까지6) 집권파인 상부 세력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하려던 중이었소
이처럼 오래 나라가 어지러우니 5부7)의 귀족들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어
나 온달과 연태조8), 을지문덕 등 신흥 무장세력이 나서게 된 것이오
평강공주가 동부의 고 씨 가문에 시집가지 않고
내게 의탁한 건 바로 안티 동부 세력의 결성이었다, 이 말이오!
내 의복이 남루하다는 것도 실은 고구려 정통 관료의 복식을 따르지 않았음을
권력층이 시샘한 것뿐이고
정쟁에 휘말리기 싫어 처음엔 어머니도 나도 공주를 피했던 것이나
평강공주 모녀의 거듭된 간청에 결국
국가를 보위하는 데 한 몸을 바치기로 하였던 것이외다
이 몸이 턱도 없는 신데렐라 기적 신화의 주인공도 아니고
평강공주의 꼭두각시는 더더욱 아니란 말이오
오히려 평원 왕비를 비롯한 왕실이 나를 필요로 하였던 것!
암튼 이왕 혼인을 맺었으니 이젠 국가와 왕실에 충성할 뿐
후주後周 무제武帝의 요동침략을 앞장서 격퇴한 것도9)그러한 활약이라오
나아가 조국의 숙원사업인 계림현과 죽령 이서以西10) 회복에 몸소 나섰으니
이는 장인인 평원왕의 붕어와 처남인 영양왕의 등극과 맞물려
내가 자청한 일이오
그리하여 신라의 적성산성赤城山城에 맞서 온달산성阿旦城을 쌓고
회심의 공격에 나섰으나 중과부적으로 일단 퇴각,
뒷날을 도모코자 부하들의 도강 작전을 지휘하다
그만 날아드는 화살流矢에 맞아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 몸의 실망과 한이 얼마나 크면 관棺이 움직이지 않고 멈췄겠소
공주가 와서 달래고 처남 영양왕도 못내 애통해하므로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긴 했지만······
어쨌거나 온달동굴 쉬는골 통쉬골 돌무지골 안이골······ 등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상기도 남아 있고11)
온달 윷판이란 이름의 전략도戰略圖 구실을 한 윷판 바위도 그대로이니
비록 천오백 년 세월이 흘렀어도 온달산성 아래를 휘감고 도는
저 시퍼런 강물의 증언을 뉘라서 부인하겠소?
그런즉 이 몸은 꼭두각시나 남자 신데렐라가 아니라
온전히 고구려를 지키고 사직을 옹위한 참 군사들의 표상이자
국가의 동량이요 겨레의 영웅이었다, 이 말이오!
-전문(p. 138-141)
1) KBS-TV 역사스페셜(2001. 11.24.), 길이 22M, 높이 10M의 층계식 적석총. 그보다 작은 규모의 돌무덤 5基가 주변에 더 있었는데, 온달과 함께 전사한 부장들의 무덤으로 보기도 함.
2) 고구려는 적어도 장수왕 때부터 국호를 高麗라 하였고, 스스로 '고리(또는 구리)'라 불렀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여기에서는 읽는 이의 혼란을 막고자 관례대로 '고구려'라 표기함.
3) 安藏王(재위 519-531, 12년간). 文咨王의 맏아들. 삼국사기는 그 사인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일본서기는 고구려 사신들의 입을 빌어 그가 시해당했다고 기술함.
4) 安岡上王 또는 香岡上王이라고도 함. 후사를 둘러싸고 추군(麤群, 새 수도인 평양성 세력)과 세군細君, 기존 수도인 국내성 세력)의 다툼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음)
5) 557년 10월. 옛 도읍인 환도성 세력을 이끌고 일으킨 간주리干朱理의 반란.
6) 평강왕 또는 平崗上好王이라고도 함. 長壽王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大城山城으로 수도를 옮긴 뒤 양원왕이 대규모의 長安城(평양) 축성공사를 시작하였는데, 평원왕 28년(586년)에 완성시켜 천도함.
7) 고구려의 중추세력은 내부(계루부/ 황부라고도 함), 북부(절노부/ 후부라고도 함), 동부(순노부/ 좌부라고도 함), 남부(관노부/ 전부라고도 함), 서부(소노부라고도 함)의 5부임. 처음엔 소노부, 6대 태조왕부턴 계루부의 高 씨가 왕위를 이음. 동부는 上部(또는 청부)라고도 하며, 평원왕 시절의 집권 세력이기도 함.
8)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 씨 가문은 연개소문의 조부 연자유淵子遊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보임.
9) 그 공로로 온달은 378년 11월 고위직인 大兄이 됨. 대형은 고구려 고유어로는 '할지襭支'라 하며, 주서周書에는 전체 13관등 중 3위, 수서隋書에는 12관등 중 2위, 신당서新唐書에는 12관등 중 6위, 한원翰苑에는 14관등 중 7위로 기록됨.
10) 550년에 신라에 빼앗긴 지역.
11) 단양 永春面 下里에 있는 '온달동굴'은 천연동굴로서 온달장군이 수양/수련한 곳. '쉬는골'은온달이 포위된 온달산성을 2차로 뚫고 한강변에 뛰어내린 발자국이 남은 바위가 있는 곳. '꼭두방터'는 신라 기마병들을 막기 위해 진 치던 곳. '쇠점붙이/쇄골'은 전투장비를 수리하던 곳. '피바위골'은 양군의 격렬한 전투로 사상자들의 피로 물든 바위가 널린 곳. '통쉬골'은 집단 화장실. '돌무지골'은 많은 전사자들을 일일이 흙에 묻을 수 없어 돌로 쌓아 표시한 곳. '분산골'은 고구려군이 한쪽 골짜기로 진격하면 집중공격을 받을까 봐 나눠서 진격한 곳. '안이골'은 양군의 부상병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함께 섞여서 산 곳. (p. 142-143)
---------------------
* 『시인하우스』 2024-상반기(창간)호 <시 2부> 에서
* 박재화/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도시의 말』『우리 깊은 세상』『전갈의 노래』『먼지가 아름답다』『비밀번호를 잊다』등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오의 산책/ 류미야 (0) | 2024.06.01 |
---|---|
대림역/ 김윤 (0) | 2024.06.01 |
몽촌(夢村)/ 나금숙 (0) | 2024.05.30 |
늪/ 김혜천 (2) | 2024.05.30 |
사하라의 그림자/ 김추인 (0) | 2024.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