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3373

세상은 다시 평온해졌다/ 조창환

세상은 다시 평온해졌다      조창환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가는 며칠 사이  여인은 잠깐 눈 한 번 떴다 감았을 뿐  의식이 없었다,  석션으로 가래를 뽑아낼 때도 반응이 없었다  고통스러운지 견딜만한지 알 수 없었다,   소변 줄로 오줌 뽑아내고, 산소호흡기로 숨 쉬게 하니  목숨 붙어있긴 하지만, 이 상태를 살았다 할 순 없었다  119 불러 구급차 타고 와 며칠 밤새운 남편과   소식 듣고 미국에서 급히 귀국한 자식들이  무거운 얼굴로 주치의를 바라보았다  흰 가운 주머니에서 흰 종이쪽지를 꺼낸 의사는  연명치료 거부 사전의향서에 사인한 뜻을  존중하고, 존경하고, 존엄히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남편도 자식들도 고개 끄덕이고, 싸늘한 손 잡고  가쁜 숨 쉬는 얼굴 오래 바라보았다  흰 가..

변명/ 정채원

변명     정채원    옆구리를 들킬까 늘 조마조마했어요  고열로 앓고 나면  꽃이 툭툭 피어나곤 했으니까요  그러다 언제부턴가 얼룩덜룩 움직이더라구요  뭐라 말을 하듯 입술이 씰룩거리듯  그러나 소리는 없었어요  어쩜 내 귀에만 들리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지요  심장이 불타는 사람의 수화처럼  어떤 날은 밤새 숨 가쁘게 움직였어요   눈 없는 벌레처럼 기어다녔어요 꿈틀거렸어요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흉터를 품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걸까요  늘 들킬까 봐 숨기고 다니지만  그래도 믿을 건 그것밖에 없다는 듯  혼자 있을 땐 가만히  손을 넣어보곤 하지요  아직도 날아가지 못했구나  안심하곤 하지요   어쩌면 자기 귀에민 들리지 않는 말들, 남들은 다 듣고도 모르는 척해주는 걸까요 어떤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9/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9      정숙자    귀뚜라미가 발등에 올라옵니다. 이따금 바람이 지나갑니다. 가랑잎 같은 달이 높고도 고요합니다. 저리 아름다운 달은 하늘보다 강호의 기쁨입니다. 지금 이대로 몸에 이끼가 나도록 앉아 있고(만) 싶어집니다. 부르려던 가을 노래는 마디마디 투명하여 보이지도 아니합니다. (1990. 10. 9.)                아큐는 누구일까요?    이 사람 저 사람 그 사람(들)에게  저자에 나가 또, 또, 또···   먹히고, 파먹히고, 퍼-먹히는, 아큐는   제 가슴속에 돌아와 홀로 승리하는  제 무덤처럼 웅크려 홀로 오열하던   그는,   자살하지 않기 위해 제 삶의 시한을 하늘에 맡긴 야인. 혹은 우리가 알거나 모르는 갑남을녀, 장삼이사, 파란불 켜졌을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9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9      정숙자    귀뚜라미가 발등에 올라옵니다. 이따금 바람이 지나갑니다. 가랑잎 같은 달이 높고도 고요합니다. 저리 아름다운 달은 하늘보다 강호의 기쁨입니다. 지금 이대로 몸에 이끼가 나도록 앉아 있고(만) 싶어집니다. 부르려던 가을 노래는 마디마디 투명하여 보이지도 아니합니다. (1990. 10. 9.)                아큐는 누구일까요?    이 사람 저 사람 그 사람(들)에게  저자에 나가 또, 또, 또···   먹히고, 파먹히고, 퍼-먹히는, 아큐는   제 가슴속에 돌아와 홀로 승리하는  제 무덤처럼 웅크려 홀로 오열하던   그는,   자살하지 않기 위해 제 삶의 시한을 하늘에 맡긴 야인. 혹은 우리가 알거나 모르는 갑남을녀, 장삼이사, 파란불 켜졌을 ..

모퉁이/ 전순영

모퉁이     전순영    1  쇠망치가 달려들어 내리칠 때 쏟아지는 보석  더 내놓으라고 폭약을 쏟아붓자 그의 몸은 산산이 날아가  모퉁이에 버려졌다  백 년이 가버린 지금 그곳에다 붓을 대고 그어 내리면  비선대가 쭉 올라오고 다시 쭉 그어 내리면  좌정하고 앉아있는 미륵봉이 솟아오르고  다시 그으면  장군봉 허리에는 금강굴을 품고 있는  병풍처럼 깎아지른 화강암 절벽  그 아래 그림같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호수를 받아먹는  시든 나무들이 보스락보스락 일어서고 있다   2  얼음이 얼음을 꼭 보듬은 이월  솜털이 보송보송한 오엽송이 쭉 뽑혀 내팽개쳐졌다  물컹물컹 물러진 뿌리를 들고 휘어진 하늘 귀퉁이에 기대서서  밤과 낮이 물처럼 흘러가고  얼어붙은 아파리에 와 닿는 햇살에 조금씩 녹아내릴 때  뇌성..

천둥 번개 덧쌓인 바윗길에서/ 이건청

천둥 번개 덧쌓인 바윗길에서      이건청    태백에서 영월 쪽으로  차를 몰고 오면서  쉼 없이 스쳐 가는  바위 벼랑들을 만난다.  저 바윗돌들이  지구가 겪어온   전 역사이며 꿈이고  풍설이며,  세수歲壽 몇 억년,  지구 역사의 기표임을  천둥 번개로 촘촘히 짜 올린  그 시간의 몸뚱이임을   어느 바위 면은 어긋나 있고  휘어져 있으며  솟구쳐 있기도 한데  누 억 년 지구가 견딘  융기, 분화, 단절 그 모습 그대로  뭉치고 굳어  이 산하의 벼랑이며 비탈되어  누억 년 서 있구나   태백을 지나 영월도 지나  이 나라 어디서나 흔히 보는  바위 벼랑 길을 휘돌아 가며  누억 년 지구 역사를 헤인다.     -전문(p. 164-165>   -------------------- * 『시인하..

불면/ 신원철

불면     신원철    터벅터벅 마른 발소리  머리 위  열사의 태양  시곗바늘처럼 일정한 보폭  끝없이 사각이는  모래의 이명  점점이 찍히는 발자국 뒤에  따라오는   그림자의 적요     -전문(p. 155)   --------------------- * 『시인하우스』 2024-상반기(창간)호  2부> 에서 * 신원철/ 2003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세상을 사랑하는 법』『동양하숙』『닥터존슨』등

밤의 성분/ 서안나

밤의 성분      서안나    밤은 어디까지 마음일까요  나는 밤을 오래 생각한다  무언가에 심취하는 일은 사랑과 같아  간 허파 갈비뼈 순서로 아프다   밤에 쓴 메모는 진실일까  밤에 쓴 메모를 아침에 지운다  밤은 휘발성인가   누군가 밤의 창문을 모두 훔쳐 간다  제멋대로 지나가는 것들마저 아름답다  약하고 아픈 것들은  수분이 많은 영혼을 끌고 다닌다  그래서 밤은 설탕 성분이 1:3 많고 고장이 잘 난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밤은 프로파간다처럼 모자를 쓰고  버려진 개와 고양이와 실패한 공원을 키운다  당신과 나와 실패한 것들은  왜 모두 밤에 포함되는가  공원의 밤은 왜 엔진처럼 시끄러운가   이어폰을 끼면 밤이 밀봉된다  유통기한이 길어진다   연결부위가 단단하다 밤은, 가끔 달아난다..

팔레스타인 피에타/ 백우선

팔레스타인 피에타      백우선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알자리라 방송 가자지구 지국장 와엔(53)은  2023년 10월 집에 있던 아내, 아들(15), 딸(7), 손자(1)를 잃었고  자신은 12월 취재 중 오른손을 다쳤으며  올 1월 7일엔 'PRESS'가 선명한 방탄조끼를 입고 차로 이동하던  같은 방송 기자인 아들 함자(27)도 잃었다.   손자 주검은 아들 함자 무릎 위에  아들과 딸과 아내의 주검은 와엘 무릎 위에 안겨있었는데  1월 7일부터는  손자, 아들 둘, 딸, 아내의 주검은 모두 와엘 무릎 위에 안겨있다.     -전문(p. 146)   --------------------- * 『시인하우스』 2024-상반기(창간)호  2부> 에서 * 백우선/ 1981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어디서 매화가 오시는지 외 1편/ 정하해

어디서 매화가 오시는지 외 1편      정하해    흙이 터지자 개울은 산을 내려간다  물이 닿을 수 있는 곳에는  모두 봄이라 옮겨 쓰고  바람의 입술은 푸르다 하자  누가 그리운 날들을 말하지  않고 매화를 만나랴  우리들 봄날은 아름답고 푸르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스무 살에 두자  저녁은 조용하고 개울은 멀리서 운다  내가 저 흰 빛을 모르듯 그도 나를 모른 채 오는 것이다  우리들의 봄날은 설레이다 끝이 난다  아프면 아픈 대로  소리없이 타도록 그냥  두자        -전문(p. 64)      -----------------------------------    다른 요일, 지나갔다    해넘이 쪽으로 산 것이거나 죽은 것이거나  모두 뻘로 돌아와 엎드렸다   생의 현관을 열어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