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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_상실의 시, 그리움의 언어(발췌)/ 봄의 건축가 : 송연숙

2023, 제9회 한국서정시문학상 수상 시집_송연숙 『봄의 건축가』> 에서     봄의 건축가      송연숙    소쩍새가 망치를 두드려  후동리 밤하늘에 구멍을 내고 있어요  소쩍소쩍 두드린 자리마다  노랗게 별이 쏟아지는 걸 보니  아마 그리움을 건축하는 중인가 봐요   노랗게 황달을 앓으며  어머닌 별처럼 익어가셨어요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몰라요  아버지가 잘못 밟아 터져버린 먹구름 솔기  등으로 그 빗줄기를 묵묵히 막아내시던 어머니   아가, 세상사를 조심하거라  아 어머니, 당신의 구부린 등 안쪽은  언제나 뜨뜻한 방이었고, 옷이었고, 밥상이었어요  조심조심 구름을 살피며 발걸음 옮기다 보니  어느새 저도 희끗한 정년의 머리카락이 보여요   잘 살았다는 안도의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흰..

이영춘_ 글은 곧 그 사람이다(발췌)/ 접속사를 고르다 : 송연숙

접속사를 고르다      송연숙    사람은 사람이 접속사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  나무들은 초록을 근거로 설명하고  물은 물소리를 저 아래로  내려 보내는 것으로 설명한다    사람은 긴 시간 동안 사람을 이어왔다   풀로 붙인 편지 봉투처럼  한 번 쓰인 접속사는 떼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나뭇잎처럼 피어나고  물소리처럼 흘러가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긴 설명의 끝에는  언제나 수긍하는 말들이 아름다웠고  짧은 설명에는 명쾌한 말들이   다음, 그 다음을 이어갔다   그러나, 반전의 문장은 늘 호흡을 가쁘게 만든다  무릎을 치는 감탄사가 등장하는가 하면  뒤통수를 치는 절망의 표정들이 들어있기도 하다  한 권의 책에는 무수한   접속사들로 페이지가 묶이고  일생을 설명하는 사용설명서같이..

김익균_시작하는 시인들을 위하여(발췌)/ 최후 : 나지환

최후     나지환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처음엔 얇은 물감 같았던 노을이 마침내 십여 분 남짓 타오르는 순간 중에서도 가장 붉고 아름답게 확산하는 순간을 말하지요. 그것은 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게 하고, 옥상에 늘어진 수국이 빛을 붙잡게 합니다.   한편 나는 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을 마지막으로 노을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아직 남아 빌딩의 유리벽을 감싸는 환한 자국을 말합니다. 그것은 물웅덩이가 밤의 검은 물이 되기 전까지 품는 밝은 그림자이고, 구름을 지우며 구름의 윤곽을 그리는 빛의 미세함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합니다. 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마땅히 찾아와야 할 짙은 코발트색 어둠이 몰려오지 않습니다. 먼 물로 돌아가서 쉬어야 할 거위들이 자전거도로..

미안하다 미안하다 외 1편/ 이혜선

미안하다 미안하다 외 1편      이혜선    딸을 팔고 백 원을 받은 그 엄마, 뛰어가 빵을 사와서 아이 입에 넣어주며 평생 배 곯린 게 마음 아파 '용서해라' 통곡했다지요 어떤 아이는 날마다 풀죽만 먹다가 생일날 아침 흰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그건 밥이 아니라고 '밥 달라' 울었다지요 풀죽을 밥으로 알고 사는 그 아이들, 풀죽도 못 먹어 맥없이 죽어가는 북녘 아이들,   미안하다 미안하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 나온 것 미안하다 살 빼려고 비지땀 흘리며 사우나에 들어앉아 미안하다 먹다가 내 배 부르다고 날마다 쓰레기통에 음식 버려 미안하다 같은 하늘 같은 핏줄 형제들 굶어 죽어도 모른 척해 미안하다 혼자만 뜨신 방에 단잠 자서 미안하다 달려가서 밥이며 약이며 쥐어주고 싶어도 가지 못해 미안하다 이유..

불이(不二), 식구/ 이혜선

불이不二, 식구      이혜선    개숫물 함부로 버리지 말아라  뜨거운 물은 식혀서 버리고  건더기 있으면 가라앉혀 버리거라   해종일 밭머리 엎드렸다 돌아오신 아버지  발갛게 익은 밀짚모자 벗어 털며  밥상머리에서 당부하는 첫마디   지렁이 굼벵이 고물고물 땅속 식구들  그 물 받아먹고 살지러  그 애들도 식군데  건더기 있으면 목이 메이고  뜨거운 물에 약한 몸 데일라   논두렁 햇쑥 돋는 산자락 논배미  모내기 하다 굽은 허리 펴는 아버지   거머리 물린 종아리 문지르며  어 씨원타,  헌혈 한 번 자알 했으니 보나마나 올 농사는 대풍일세.     -전문-   해설> 한 문장: 작품 「불이(불이, 식구)는 시집의 제1부 첫장을 차지한 작품이다. 아마도 시인의 유년체험이고, 실제의 아버지 말씀이..

창문의 역사 외 1편/ 이순주

창문의 역사 외 1편      이순주    창 밖에 산이 있다  겨울에서 이른 봄까지 나는 순장되다  창문을 열면 비로소 펼쳐지는   거대한 사서의 하루  책장을 넘기는 바람의 긴 손가락들 보이고,    봄을 읽는 새소리는   아직 옷장 서랍에 봄이 들어 있다고  봄의 온도는 잘 개켜진 꽃무늬 티셔츠라고  여기는   내 손을 잡아 일으킨다  뺵빽이 꽂힌 나무들이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미래의 도서관   나는 겨울을 밀고  봄을 잡아당겨 무덤의 문을 열어젖혔다      -전문(p. 48-49)      -------------------------------------------------------    어떤 계절은 구석에서 시작된다    나는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먼지  나의 계절은 구석에서 시작된..

잎들의 아침은 화병 속에서 걸어 나온다/ 이순주

잎들의 아침은 화병 속에서 걸어 나온다      이순주    맨 처음 고구마는 내가 읽을 수 없는 문장이었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검은 비닐 봉지 속에서 싹들은 고개를 내밀고   전언은   주둥이가 넓고 엉덩이는 큰 화병에 고구마를 넣고  물을 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고 싶은 말 가슴에 묻고 오죽 답답했을까   화병의 심장이 된 고구마  제 몸을 온전히 잎들에게 내어준다  화병의 날개 같은 잎들이 자란다   하트 모양 둥근 잎들이야말로 내게 하는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   나는 화병과 뜻을 같이하기로 한다   줄기들 창문을 붙잡고 기어오르는  저 날갯짓,   사는 일은 안간힘을 다해 비행을 꿈꾸는 일이 아닌가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에서 나는 방치된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

반지 외 1편/ 함명춘

반지 외 1편      함명춘    철골같이 꼿꼿하게 살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우리에겐 한 뼘도 안 되는 보잘것없는 일이지만  그에겐 솔깃하게 귀를 적시는 햇빛과  바람의 가시밭으로 가득한  천리의 사잇길이요 갈림길이다  뼈보다도 단단하고 그 어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제 의지의 푸른 징을 박아넣으며  묵묵히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엔  그의 전 생애가 달려 있다  옆으로 쓰러지든 앞으로 부러지든  한번 결정되면 그것이 곧 두리번거릴 수 없는 외길이라는  마음으로 수천 년을 살아온 대나무   그래서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엔  굵고 선명하게 빛이 나는 결속의 반지가 끼워져 있다  자기에게로 수백 번씩 휘둘러댄 채찍 자국과 핏방울이 맺혀 있다      -전..

나뭇가지 길/ 함명춘

나뭇가지 길         함명춘    한번 뻗으면 다시는 되돌아올 줄 모르는  나뭇가지의 길을 걸었다  빛이 흐르는 쪽으로 그들이 허릴 비틀면  나도 따라 허릴 비틀면서  그 길은 아무리 걸어도 몸 누일 곳이 없었다  오로지 걷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  언제나 빨랫줄처럼 걸려 있어  조그만 바람에도 몹시 흔들렸지만  난 온몸이 나뭇가지  수십 개의 잎사귀를 매달고  있는 듯 없는 듯 세상이 낮게 내려다보이는  그 길 위에서 빛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 꺾인 무릎을 다시 펴고 한없이 걷고 있었다  빛, 눈부시도록 많은 유리 창문을 두르고 서 있는  그 거대한 집을 향해  죽고 싶어, 그 집 속에 갇힌 채 영원히 살고 싶어     -전문-     개정판 시인의 말> 전문: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을 ..

우리 시대 문학과 건축 사이의 행간 읽기(부분)/ 장수철

우리 시대 문학과 건축 사이의 행간 읽기(부분)      장수철    건축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건축 언어"라는 표현에서도 문학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미학적 견지에서 건축가의 주관적인 의도가 건축적 언어(예컨대 형태, 색채, 구조, 크기, 척도, 배치, 자연요소, 디자인, 스타일, 나아가 사회적 맥락과 소통 등)를 통해 건축물의 조형성으로 발화되고, 이 발화체가 읽는 이로 하여금 심미적 체험을 가능케 한다는 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관점에서 문학과 건축 사이의 장르적 유비가 가능한 것은, 근본적으로 두 장르 모두 인간의 삶을 전제하기 때문임을 간과할 수 없다. 건축은 인간이 기거하는 '물리적 공간'을 만드는 행위이고 문학은 인간이 채워가야 하는 '의미의 공간'을 만드는 행위이다. ..

한 줄 노트 2024.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