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9 9

봄밤/ 함태숙

봄밤     함태숙    이 거대한 짐승을 끄고 돌멩이 하나에 눈동자를 묻는 것을 보았다  영원에 필적하는 것들이 하나의 우연과 하나의 개별성에 의탁해 오는 밤을   별과 돌의 공명  내포하기 위하여 분열한 것들   지금 오는 것은 돌아오는 것이다  자기를 애도하기 위하여  빛은  작은 돌처럼 꾸르륵 꾸르륵 소리를 내며  지워진 멧비둘기 식도 안에서 피어난다   아난다여, 이제 나의 입은 어느 곳에 묻을 것인가   불타는 심장으로부터 분리된 첫 번째  환각을  사라지는 얼굴에 드리우고 드리우고      -전문(p. 189)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함태숙/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새들은 창천에서 죽다』『그대는 한 사람의 인류』『토성에서 생각..

아무도 없는 몸/ 정병근

아무도  없는 몸      정병근    혼자는 언제든 상하기 쉬운 자세로  뒤통수에 깍지를 끼거나 다리를 턴다  발톱이 자라고 털이 우거진다   비밀 하나를 공유할 때  우리는 겨우 신뢰할 수 있다   태어나서 죽는 생은 정해져 있어서  당신의 정면은 회피하기 좋다  시간은 무수한 측면으로 쪼개지다가  등을 남기며 사라진다   버려지는 관심 밖에서 증오가 자라고  몸은 절벽 앞에 선 자세로  터무니없는 적의를 불태운다  숭고한 원수가 온다   아무 것도 안 하는  말없는 말들이 수북이 쌓인 구석엔  먹고 흘리고 닦은 것들이 불룩하다   인간은 나무에서 내려온 혼자   여럿의 눈을 벗어난 몸 하나가  어둠 속을 배회하다가  무언가를 줍거나 툭 던지고 사라진다       -전문(p. 182-183)  ---..

납작하다는 말/ 이현

납작하다는 말      이현    겨울눈 내리는 날 엄마는 수제비를 끓였다  반죽을 얇게 펴야 맛있는 수제비가 뜬단다  얼기설기 묵은지 잘라넣은 펄펄 끓는 물에  하얗고 평평한 조약돌 같은 수제비가 떠오르면  어두운 강가에 나가 남몰래 물수제비를 띄웠다   그래, 납작하다는 말 생각하면 참 슬프다  각지고 모난 것들 얇게 펴는 그런 일  눈도 코도 입도 있는 듯 없는 듯  해저 연체동물처럼 뼈도 없이 납작하게 아, 평평하게  바람 부는 세상 위로 부유하며 떠가는 그런 일   엄마는 떠나고 몸살기 드는 겨울 저녁  묵은지 잘라 넣은 물 위에 뜬 수제비 먹는다  살아가기 위해 습관처럼 착하게 아, 비겁하게  기울어진 세상 눈 감고 모난 생각 부러 누르고  어둠 내린 허공에 목숨 하나 걸치고 떠가는 그런 일 ..

붓꽃/ 이근영

붓꽃     이근영    노란색 불빛으로 색칠한 카페 테라스  짙푸른 색의 우울이 숨어 있는 하늘  풍부하게 채색이 되는 밤   너에게 편지를 쓸게   까마귀들이 몰려드는 끊어진 길가  회오리바람에 휘둘린 별이,  별들이 빛나던   그림을 너무 자세히 보다가 목이 칼칼해졌어  날숨이 울대마개를 스치고 나올 때마다  보라색 꽃잎이 바스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살아있으면 다행인 거야  열 번도 더 죽을 수 있었는데   너무 오랜 시간 책장을 넘기고 있었어   컴컴하게 덧칠한 색채를 긁어내면  나이프 가득 묻어나는 어두운 피   진화하는, 너는  피를 묻히는 것  피 묻은 너를 그리는 것  캔버스에 너의 피를 뿌리는 것   곧게 목을 세운 붓꽃은 정원의 구석에 서서 휘돌아 가며 빛나는 별의 꼬리를..

무녀도 갈매기/ 이서란

무녀도 갈매기      이서란    더 끄슬릴 것도 없는 얼굴을  햇빛 가리개로 가린  동티모르의 사나이   길을 묻는 말에 애써 피하며  그쎈미소*로 땀방울을 흘리면서  찢어진 어망을 깁고 있다   옆에서는 집게다리를 높게 들며  괴발개발 그물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달랑게가 재바르다   바다가 겨우 뭉쳐놓은 모래성 위에  노을 한 조각  물고 날아오는 갈매기   살림살이는 나아지기는커녕  하얗게 질린 파도 발자국만  덩그러니 통장에 찍혀 있다   밀려오는 그리움  휴대전화에 내장된 두 살배기 아들  얼굴 위로 주르륵 쏟아진다      -전문(p. 44-45)   * 그쎈미소: 눈은 웃지 않고 입으로만 웃는 모습, 가짜미소---------------* 군산시인포럼 제4집『바다의 메일』에서/ 2024. ..

부고/ 원탁희

부고     원탁희    어젯밤 잠을 설쳤다  상여 나가는 꿈속  상두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빠져  어허 어허이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그런데 친구가 상여 위에서 앉아 손을 흔들면서 웃고 있었다  왜 네가 거기 앉아 있으며 어디 가느냐고 묻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고 으으으 하다가 잠이 깨었다  이른 아침 날아온 문자  어젯밤 그 친구의 부고였다  어 참 허 참  어허 허 참  찬물을 한 잔 들이켜고서야 정신을 차린다.     -전문(p. 149)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원탁희/ 1996년『시와시인』으로 등단, 시집『세상살이』

붓꽃 피다/ 신덕룡

붓꽃 피다      신덕룡    이름값을 하느라 저렇듯 망설였구나    새로 꺼내든 붓끝에  먹물부터 잔뜩 머금었지만   바람결에 잎새들 뒤척일 때마다 마음이 바뀌고 흔들리는지 한 글자 쓰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걸 모를까 멀리서 날아온 나비 한 마리 잠시 머물다 간 뒤   글썽이는, 필설로는 다 하지 못할 그리움이 더 아득해졌는지 붓을 놓아버렸다 팔을 쭉 뻗어 먹물로 얼룩진 손바닥을 펴고 흔들어댄다   눈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어 놓았다   잠깐의 머뭇거림 하나 없이 부끄러움도 없이     -전문(p. 144)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신덕룡/ 1985년『현대문학』으로 (평론 부문) & 2002년『시와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소리의 감옥』..

사막의 여우/ 권선옥

사막의 여우      권선옥    바하리야사막 한복판  뜨거운 모래밭  군데군데 풍화하는 푸시시한 돌덩이,  비람에 날아온 풀씨도  싹 트지 않는 허허벌판.  먹을 것을 찾아  느릿느릿 돌덩이 사이를 기웃대는,  어린 여우를 만났다.  발바닥에 불이 나는  저 막막한 모래벌판에는  입술을 적실 물 한 모금조차  없다.  생명은 독하게 야속하고 모진 것,  저 아이도 무사히 자라 어미가 되고  그 어미처럼 새끼를 낳게 해 달라고  나는 그저, 하나님, 하나님  연거푸 하나님을 불렀다.      -전문(p. 121)   ---------------* 『시현실』 2023-여름(92)호 에서  * 권선옥/ 1976년 『현대시학』추천 완료, 시집『감옥의 자유』『허물을 벗다』『밥풀 하나』등, 시선집『별은 밤에 자..

오형엽_조병화 시의 역설적 의미 구조 연구(발췌)/ 너와 나는 : 조병화

너와 나는      조병화(1921-2003, 82세)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 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 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 버린 캘린더 속에  모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랑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들이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 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샹들리에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