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는
조병화(1921-2003, 82세)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 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 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 버린 캘린더 속에
모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랑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들이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 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샹들리에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작별을 해야 한다.
너와
나는
-전문/ 『조병화 시 전집 1』(국학자료원, 2013/ p. 167-168)
▶조병화 시의 역설적 의미 구조 연구(부분)_오형엽/ 문학평론가
이 시의 1연에는 조병화 시의 이별이 가지는 이율배반적 역설의 긴장이 양가적 시어로 드러난다. 시적 화자에게 있어 "이별"은 사랑했던 사람과의 경험 및 추억과 단절시키는 과거와의 작별이다. 따라서 그것이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이다. 그런데 화자는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라고 말한다. "슬픈" 감정은 단지 화자가 현재 느끼는 정서 자체로 표현되지 않고 "시절" 즉 시간적 차원과 결부되어 표현되는데, 이것은 조병화 시에서 정서가 시간 의식과 밀접히 상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시간 의식은 단순히 과거, 현재, 미래 등 어느 하나의 시간대와 연결되지 않고, 과거와 현재가 복합적으로 중첩되면서 기억과 망각이 충돌하며 교차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차원에서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라는 문장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처럼 1연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기억과 망각이라는 이율배반성이 충돌하는 역설적 긴장을 내면적으로 숨기고 있다. 이러한 역설은 2연의 "내일"에 대한 기대로도 전이되고 있다. 2연은 표면적으로 화자가 과거와 동일하게 반복되는 현재의 일상적 현실 속에서 내일을 기대하며 모든 사랑과 작별해야 한다는 각오를 표현한다. "기도"로 맞이하는 "그날"은 "내일"이라는 미래이다. 그러나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라는 문장의 어조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확신이 아니라 회의를 동반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 1연이 기억과 망각의 이율배반성을 통해 과거와의 작별을 표현하고 2연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미래적 회의가 복합적으로 중첩되면서 이율배반성을 통해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 영속적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조병화 시 세계를 지배하는 '고독'과 '허무'는 바로 이러한 역설의 비밀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 시 96-97/ 론 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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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 2023-여름(92)호 <특별기획/ 조병화 시인 특집> 에서
* 오형엽/ 1994년『현대시』신인추천작품상 &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비평집『신체와 문체』『주름과 기억』『환상과 실재』『알레고리와 숭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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