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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고_세계문학 속의『한국전쟁』中/ 마거리트 히긴스

검지 정숙자 2021. 7. 17.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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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거리트 히긴스

    - Marguerite Higgins, 1920-1966, 46세

 

                     

    『자유를 위한 희생

    War in Korea(1951)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자로 한국전쟁 발발 이틀 후에 한국전선으로 건너와 직접 현장취재를 하고, 이듬해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1951)이란 책을 내어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책은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 이상의 현장감이 넘치는 명작이다. 앙투아네트 메이(Antoinette May)가 그녀에 대해 쓴 전기 『전쟁의 목격자(Witness to War』(1983)도 2019년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마거리트 히긴스는 1920년 9월 2일 홍콩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아버지 로렌스 히긴스(Lawrence Higgins)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프랑스군에 자원입대하여 운전사,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프랑스인으로 파리에서 은행원으로 일했으며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다. 둘은 전쟁 중에 만나 결혼했다. 1918년 아버지는 버클리대학 법학도의 꿈을 포기하고 선박회사의 매니저로 부인과 함께 홍콩으로 갔다. 마거리트는 유아시절 중국인 유모에게 중국어(광동어)를 배우고 부모에게 불어를 배웠다. 1920년대에 히긴스 가족은 다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마거리트에게 큰 기대를 걸고 교육에 집중했다. 그래서 마거리트는 버클리대학에 입학하여 대학신문 기자로 활동하였다. 졸업 후 직장을 구하지 못해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언론대학원에 진학하였다. 1942년 6월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기자가 되었다. 그해 하버드대 철학과 강사 스텐리 무어(Stanley Moore)와 결혼하였으나 이내 이혼하였다. 무어는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이유로 하버드에서 해직되었고, 후일 샌디에이고대학에서 강의했다.

  1944년 미군이 독일의 부헨발트(Buchenwaid)를 점령할 때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독일 다하우(Dachau)의 나치스 강제수용소를 취재해 기자로서 용기와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후 1947년부터 3년간 독일 베를린 지국장으로 근무하면서 냉전 하의 동서독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뉘른베르크재판도 취재하였고, 소련에 의한 베를린 장벽 설치도 취재하였다. 이때 미 공군 전보국장 윌리엄 홀(William Evans Hall, 1907-1984, 77세)을 만나 13세의 차이에도 열렬하게 사랑을 하였다. 

  1950년에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도쿄지국장으로 발령을 받고 부임하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취재차 바로 한국으로 건너갔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윌리엄 홀과 재혼하였다. 이듬해 첫 딸을 낳았으나 생후 5일 만에 미숙아로 죽었다. 1958년에 아들, 1959년에 딸을 낳았다. 1953~54년 베트남전쟁 종군기자로서 프랑스의 패배를 취재했다. 여기서 유명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 41세)가 지뢰를 밟아 죽는 광경을 옆에서 목격했다.

  1955년 소련입국 비자를 받아 냉전이 한창이던 철의 장막을 취재하여 『붉은 벨벳과 흑빵(Red Plush and Black Bread)』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같은 해 자서전 성격의 『뉴스는 남다른 것(News is a Singular Thing)』이란 책을 내었다.

  히긴스는 이후 10년간 세계를 여행하였다. 1961년 몽고내전을 취재하고 1963년에는 다시 베트남을 여행했다. 1963년엔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사직하고 ⟪뉴스데이⟫ 신문사로 이적하여 <현장에서(On the Spot)>라는 고정칼럼을 꾸준히 썼다. 1965년에는 『우리의 베트남 악몽(Our Vietnamese Nightmare)』이란 책을 내었는데, 한국전쟁과는 달리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우려하는 입장이었다. 1965년 다시 베트남을 여행하다 풍토병에 감염되어 워싱턴의 미 육군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다 1966년 1월 3일 아깝게도 45세로 사망했다. 미국정부는 그녀의 종군기자로서의 공적을 인정하여 워싱턴의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녀는 '겁없는 여자', '혈관 속에 얼음물이 흐르는 여자', '드레스보다 군복이 더 어울리는 여자', '화장품 대신 진흙을 바른 여자', '혈육으로 삼고 싶은 유일한 여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녀의 남편 윌리엄 홀 중장은 18년 후인 1984년 그녀의 곁에 묻혔다.

  2010년 9월 2일 대한민국 정부는 수교훈장을 추서하였고 딸과 손자가 대신 수령하였다. 2016년 국가보훈처는 '5월의 영웅'으로 선정하였다.

 

 

    작품 속으로

                   

  한국전쟁에 관한 세계 최초의 단행본인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은 베스트헬러가 되어 수개 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그녀에게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또한 AP 통신사는 그녀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였고, 해외기자클럽으로부터 조지 포크상, 미 해병대 예비역장교상도 받았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헌사로 시작된다. "이 책을 먼 이국땅 한국에 있는 묘비명도 없는 무덤에서 마지막 전우애를 나누며 나란히 잠들어 있는 유엔군 장병들을 위해 바친다." 그리고 머리말은 이렇다. "이 책은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한국전쟁의 주요 국민들을 보고하려는 것이다. 나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부터 12월까지의 기간 중 11월의 4주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계속 전선에 있었다. 이 경험을 토대로 한국전쟁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생각되는 사건들과 일화들을 골라봤다. 이를 통해 적의 공격과 우리 반격의 실상, 우리의 약점과 강점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배운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히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서울, 1951년 1월 1일."

  이 책은 시종일관 그야말로 소설 못지않게 현장감 있는 서술이 돋보인다. 여성 저널리스트의 재치와 감수성을 한꺽 발휘하고 있다.

 

  이틀 후 나를 실은 비행기는 번쩍이는 제트전투기의 엄호를 받으며 한국전쟁 지역의 심장부로 굉음을 내며 날아가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참전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 비행기는 전쟁에 휘말린 미국시민 중 마지막 남은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적의 포위공격을 받고 있는 한국의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탑승객이라고는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키스 비치(Keys Beach), ⟪타임스⟫의 프랭크 기브니(Frank Gibney), ⟪뉴욕 타임스⟫의 버튼 크레인(Burton Crane) 과 나, 이렇게 4명의 특파원이 전부였다. 우리는 미국이 한국을 위한 전투에 개입하는 것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들이 되었다. 미국은 이 전투를 준비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허겁지검 땅을 파서 만든 무덤들은 적을 과소평가한 끔찍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증언해주고 있다. 그러나 전쟁 중 한반도에서 많은 비극이 발생했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격퇴했다는 것이 자유세계를 위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지금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인들을 잠에서 깨우는 일종의 국제적 자명종 시계의 역할을 한 것이다. (13-14쪽)

 

  저자는 한국전쟁 초기에 서울을 빠져나가는 피난민들의 모습을 생생히 서술하고 있다.

 

  서울에 이르는 길은 피난민들로 붐볐다. 수백 명의 한국여인들은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머리에는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있었다. 수십 대의 트럭은 나뭇가지로 교묘히 위장되었다. 한국군인들은 지프차와 말을 타고 양쪽 방향으로 줄을 지어 지나갔다. 비에 젖은 거리 위에서 피난민들이 우리 미국인들의 작은 차량행렬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은 가슴 뭉클하지만 어딘지 겁나는 경험이었다. 이들은 미국에게 그 무엇인가를 기대했고, 그들의 기대가 충족될 것이라는 애처로운 정도의 뚜렷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간절한 희망이 자리 잡았다. "우리가 저 사람들을 낙담시키면 안 될 텐데." 이후에도 나는 자주 같은 생각을 했다. (20쪽)

 

  "아이쿠, 큰일이야! 다리가 끊겼네."

  중위가 외쳤다. 우리는 갇힌 신세가 되었다. 남쪽에 안전하게 인도해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것이다. 우리는 지프차의 방향을 바꿔 미 군사고문단 본부로 되돌아왔다. 포탄 폭발음에 의해 밤의 적막이 두려움으로 변해가는 가운데 라이트 대령 휘하 59명의 부대원들이 하나둘씩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라이트 대령이 증오에 찬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한국인들이 우리에게 한마디 경고도 없이 한강 인도교을 날려버렸다. 서울시의 대부분 지역이 아직 한국인들의 수중에 있는데 너무도 빨리 교량을 폭파시켰다. 자국 군인들을 실은 트럭들이 다리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다리를 날려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수백 명의 자국민을 살상했다." 상황은 분명 심각했고 매우 혼란스러웠다. 왜 한국군 지휘관들이 느닷없이 도망가 버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주변의 간헐적인 총성으로는 적이 현재 어디에 있고, 공격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판단할 수 없었다. 다수의 장교들은 서둘러 빠져나가지 않으면 포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얼거림은 극도의 심리적 불안감으로 비화되었다. 그러나 라이트 대령은 침착하게 위엄을 보이며 사태를 진정시켰다. "자, 제군들! 주목하기 바란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혼자 도망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공동운명체다. 모두가 집합할 때까지 침착해야 한다. 그다음에 차량들을 가지고 서울을 빠져나갈 대안, 어쩌면 조립교組立橋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지프차, 트럭, 무기수송차량 등 60여 대의 차량대열을 정비하고 전조등을 밝힌 채 출발했다. 언제 적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길이었지만 차량을 도강시킬 수 있는 조립교를 찾아 몇 시간이나 헤매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30-31쪽)

  

  히긴스는 맥아더 장군과도 만났는데 , 그녀가 본 그의 모습을 이렇다.

 

  맥아더 장군이 비행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바람이 세찬 활주로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그의 방문에 긴급기사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그는 금실로 바탄섬 모양을 수놓은 모자를 쓰고, 옷깃 부분을 열어놓은 셔츠 위에 여름용 황갈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옥수수 속대로 만든 파이프에서는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각 군의 장성들로 구성된 수행원단이 그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내가 전에 본 적이 없는 인물들이었다.맥아더 장군은 활주로에서 나를 보자,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는 도쿄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같이 탑승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통신을 목적으로 일본에 되돌아가 기사를 송고하기 위해서는 '바탄' 비행기가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나의 맥아더 전용기 탑승은 네 명의 미국 언론사 지국장들을 상당히 화나게 만들었다. (37-38쪽)

 

  직접 만나보면 맥아더 장군은 인자하고 대단히 명석한 인물이다. 맥아더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폼 잡기 좋아하는 인물이라고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는 그러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맥아더는 도쿄에서 대부분의 언론인들과 거리를 두고 생활해 왔는데 이는 그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 그가 아무리 재주 있고 선량한 인간이라도 특파원들은 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특파원들은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악의적인 보도를 했고, 이러한 보도는 맥아더와 그의 지휘부로 하여금 특파원들과의 서먹서먹한 관계를 더욱 증폭시켰다. 맥아더 장군은 극히 일부의 충성스런 측근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답적이며 격리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이로써 일본인들로부터 존경심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고, 점령의 목표들을 성취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39-40쪽)

 

  미국 정부가 맥아더를 한국에 보낸 것은 한국을 구원하는 데 공군과 해군 지원만으로 가능한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를 포기한다는 기존의 결정을 번복하여 가능하다면 이제는 이 반공의 보루를 구원하겠다고 결정한 것이 분명했다. 한국군이 후퇴하는 전선을 시찰한 맥아더는 한국을 구하려면 지상군의 파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한국인들은 미군 정예부대의 투입을 필요로 합니다. 한국군 장병들은 신체조건이 좋습니다. 솔선수범하는 지휘관이 있으면 전의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내게 2개 사단만 주어지면 한국을 지켜냘 수 있습니다. (40쪽)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진격했다. 만약 북한군이 부산까지 손에 넣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에 북한군은 부산까지 진격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기자는 말하고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북한군은 잘 무장된 6개사단 병력으로 우리의 기세를 꺾고 있는 중이었다. 왜 그들은 그때 부산까지 계속 밀어부치지 않았을까? 이는 한국전쟁의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만약 그들이 강하게 밀어부쳤다면 우리의 방어선은 무너졌을 것이다. 이는 지금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당시 적군을 맞아 싸운 것은 기껏해야 1,000명의 미군과 지리멸렬한 한국군 잔여 병력뿐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공산주의자들이 개전 초기 몇 주 동안 머뭇거린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실수라고 믿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과소평가한 만큼, 그들은 우리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우리 대대가 최후의 결전에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남아서 전투를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98쪽)

 

  히긴스는 진실을 알리는 기자였다. 중군기자였던 그녀는 "미군이 전쟁에서 아무 문제없이 승리하고 있다."라는 기사를 써달라는 부탁에 시달렸지만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취재를 하는 대부분의 미국 종군기자들은, 나의 좁은 식견인지는 몰라도, 미군이 기대 이상으로 잘 싸운다는 기사를 싣도록 유혹을 받는다. 미 해병대와 '늑대사냥개'라는 별명을 가진 미 육군 제27보병연대는 그들에 대한 명성이 정당하다는 보도가 나가기를 원했으며, 그들은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 비쳐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개인이 이런 이론에 반하는 행위를 하면 매도당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하다는 집단적인 의견에 따라 행동했다. 때때로 이는 집단정신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해병 제5연대장 레이먼드 머레이(Raymond Murray) 중령은 간단히 말한다. "지독히 용감합니다. 해병대원들은 자기들로 인해 다른 동료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떄문에 열심히 싸우는 겁니다. 다른 동료들이 상당히 놓은 수준의 사기를 갖고 있거든요. (116쪽)

 

  한국전의 초기 며칠간을 회상하는 미군병사들이 누구나 몸서리치며 기억하는 사실이 있다. 많은 미군병사들이 재빠른 제트전투기가 아군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방해가 되었다고 느꼈다는 점이다. 나는 초기 전투 중 나흘간을 대대와 함께 이동하고 있었는데, 매일 아군 전투제트기들의 폭탄세례를 받았다. 전투 이틀째 참호에 숨어서 아군 전투기가 우리를 직접 겨냥하고 로켓탄을 발사하는 것을 본 미군 병사 한 명이 우리 모두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왜 저기 제트전투기 조종사 놈들은 3만 피트 상공에 머물러 있든지, 아니면 정교클럽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야?" 그러나 이런 일은 개전 후 며칠 동안이었다. 이후 지상과 공중 간의 조정기술이 놀랄 정도로 개선되었다. 공군의 전술은 짧은 연습기간으로는 개선되지 않는 법인데, 놀랄 정도로 단기간 내에 문제점이 해소되었다. 나는 지상군과 공군 간의 형편없는 공조체제에 관한 첫 기사를 쓴 사람 중의 하나이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엇박자에 관한 보도는 불공평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24쪽)

 

  이 책은 수복된 서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한국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도 전하고 있다. 

 

  성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십자가는 계단에서 떼어졌으며, 모든 종교들의 상징들은 건물에서 제거되어 있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 포스터들이 벽에서 웃는 낯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벽에는 천진난만한 어린애들이나 부녀자들을 살해하는 장면들을 그린 포스터들도 붙어 있었다. 성당은 공산당 본부로 사용된 것이 분명했다. (211쪽)

 

  나는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의 경찰활동에 대해 자주 얘기를 나눈 바 있다. 그때마다 그는 한국에서 법치주의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한국 경찰이 영장 없이는 채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북한군 침략으로 인한 혼란 중에 법치주의가 종종 무시됐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생포된 공산주의자들이 야만적으로 즉결 처형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사건들은 전쟁에 의해 야기된 흥분된 감정이 빚어낸 불가피한 결과라면서, 한국 정부가 이런 사건들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재적인 기질을 지녔지만 진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진 인물로 보였다. 나는 그가 자신을 동양의 윈스턴 처칠과 같은 인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의 승리가 임박한 것처럼 보였던 1950년 9월 화창한 가을날, 이승만 대통령이 들려준 마지막 말들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번에 우리가 학습했듯이 당신의 정부도 공산주의자들과의 타협이란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언제나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자, 상대가 의심하지 않도록 달래는 속임수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속셈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준비가 너무 늦어져 그들의 다음번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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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고 지음_ 세계문학 속의 『한국전쟁』 38인의 작가로 읽다/ 2021. 6. 25. <와이겔리> 펴냄

  * 최종고崔鐘庫/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모교 서울대학교 법괃대학에서 33년간 교수로 법사상사를 가르쳤다, 많은 학술서를 저술하여 2012년 삼일문화상 수상하였다. 2013년 정년 후에 문학은 인생의 대도大道라는 생각으로 시인으로, 수필가로 등단, 『괴테의 이름으로』, 『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전3권) 등 시집과 문학서를 내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고, <한국인물전기학회>, <한국펄벅연구회>를 운영하고 있다. <국제PEN한국본부>, <공간시낭독회>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