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파트의 글

이철경 평론집『심해를 유영하는 시어』中/ 버찌의 저녁 : 고영민

검지 정숙자 2021. 3. 5. 15:56

 

    버찌의 저녁

 

    고영민

 

 

  그때 허공을 들어 올렸던 흰 꽃들은 얼마나 찬란했던가 꺼지기 전 잠깐 더 밝은 빛을 내고 사라지는 촛불처럼 이제 흰 꽃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 자리에 검은 버찌가 달려 있을 뿐이다 가장 환한 것은 가장 어두운 것의 속셈, 버찌는 몸속에 검은 피를 담고 둥근 창문을 걸어잠근 채 잎새 사이에 숨어 있다 어떤 이는 이 나무 아래에서 미루었던 사랑을 고백하고 어떤 이는 날리는 꽃잎을 어깨로 받으며 폐지를 묶은 손수레와 함께 나무 아래를 천천히 걸었을 터, 누구도 이젠 저 열매의 전생이 눈부신 흰 꽃이었음을 짐작하지 못한다 지났기에 모든 전생은 다 아름다운 건가 하지만 한때 사랑의 이유였던 것이 어느 순간 이별의 이유가 되고 마는 것처럼 찬란을 뒤로한 채 꽃은 다시 어둠에서 시작해야 한다 흰 꽃은 지금 버찌의 어디까지 와 있는 걸까 그리고 저 버찌의 오늘은 얼마나 검은가

  -부분, 시집 『구구』 2015, 문학동네

 

 

  ▶ 찬란한 꽃과 어두운 현실의 대비/ -고영민 시집 『구구』(발췌)_ 이철경/ 시인 문학평론가 

 

  시인은 「버찌의 저녁」에서 "꺼지기 전 잠깐 더 밝은 빛을 내고 사라지는 촛불처럼" 밝음과 어둠을 대비시키면서 "흰 꽃"과 "검은 버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시간에 따라 사라지는 것을 "가장 환한 것은 가장 어두운 것의 속셈"으로 통찰력 있게 호소한다. 버찌나무 아래 찬란한 청춘의 표상인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고, 희망 없이 살고 있는 "폐지를 묶은 손수레와 함께" 걸어가는 이미지는 또 다른 울림을 준다. 밝음과 어둠은 청년과 노년의 힘겨운 노동으로 치환되어 독자의 시선을 움켜쥔다. 시적 상승 단계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밝음과 어둠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된다. 버찌나무 아래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한때 사랑의 이유였던 것이 어느 순간 이별의 이유가 되고 마는 것처럼" 가슴 시린 슬픔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이 시에서 자연에 속한 인간 또한 삶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보여주면서 버찌의 찬란한 꽃과 현실의 어두운 이미지에서 다시 한 번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p. 시 31/ 론 31-32)

 

 

   ----------------

  * 이철경 평론집 『심해를 유영하는 시어』에서/ 2021. 1. 19. <포엠포엠> 펴냄

  * 이철경/ 전북 순창 출생, 2011년 『발견』으로 시 부문 & 2012년 『포엠포엠』으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 『단 한 명뿐인 세상의 모든 그녀』 『죽은 사회의 시인들』 『한정판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