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신동옥_ 다시, 「거위와 점등인의 별에서」(발췌)/ 점자별 1 : 손택수

검지 정숙자 2020. 1. 29. 02:32



    점자별 1


    손택수



  호머는 맹인이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눈을 잃고도 그는 노래를 알았으니까

  노래의 눈을 갖고 있었으니까


  전자책을 더듬는 손에게

  말은 육체의 굴곡, 누르면

  오돌토돌

  피를 통하게 하는

  지압판


  이파리를 만지면

  가상이 끝이 표 나지 않게 살짝

  말려있을 거예요


  가을이 오고 있다고, 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수척해진 게

  들리지 않느냐고, 오래전 팔짱을 끼고 다니던 사람


  빛을 잃고 손때가 묻어 까무스름 빛이 나는 말들이 있다

  씨앗봉투처럼 뿌려진 페이지의 맥박을 짚어본다

    -전문-



  ▶ 다시,『거위와 점등인의 별에서』(발췌)_ 신동옥/ 시인

  고대 서사시 연구에서 '호메로스(호머)'의 위치는 개인적 재능과 당대까지 적층된 구비서사의 전통이 결합된 '극단적인 형태'로 정리된다. 호메로스가 시각을 잃었다는 표현은 물론 비유의 측면에서 읽힌다. 마치 사마천의 불구를 '역사'와 연결짓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각과 감각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써내려간 형상'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미지에 대한 물음은 이 지점까지 연결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애초에 쓰려고 한 "노래"는 무엇인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으며, 감촉되지도 않고, 영원히 정지시킬 수도 없는 그것, 흐르는가 하면 휘발되는 그것을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다시 들뢰즈, 지각, 개념, 이미지를 동원해서 파지하려 했던 '형상'은 지각, 개념, 이미지를 포함한 모든 작용을 넘어서는 지점으로 달아난다. 애초에 형상이 놓였던 자리로 달아난다. 형상은 '사물과 동등한 존재론적인 가치를 획득한 자족적이고 독자적인 상' 즉 이미지가 된다. 시적 상상력은 이미지로 이미지를 그리는 '행위'라는 논리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미리 전제된 초월적인 개념 근거에서 이탈하여 물 자체와 대면하는 말에 대한 가없는 꿈. 그렇게 이어가는 시행은 "점자책을 더듬는 손"으로 읽히는 문법과 같으며, 시를 통해 재생산되는 "말은 육체의 굴곡"이다. 모든 언어는 "누르면/ 오돌토돌/ 피를 통하게 하는" 존재의 "지압판"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독법은 지나치게 '철학적'이다. 철학은 한 줄의 가정을 입증하기 위해 문장을 영원히 정지시키는 것만 같은 논증의 과정을 거친다. 예감과 현시를 괄호 친 자리에 '가정'을 영속시킨다. 사유라는 이름의 족쇄. 하지만 시는 '독해'의 영역이지 '논증'의 영역이 아니다. 그럼에도 시의 문장은  겸허하게 논증의 기술을 행간에 부릴 줄 아는 지적 섬세함을 요구한다. 시적 비약은 존재의 비약이다. 우리가 쓰는 동일한 문법과 규칙을 갖춘 언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미지는 관점을 번역하며, 말에 대한 과잉된 자의식을 추동한다.(p. 시 104-105/ 론 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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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아돌하』 2019-겨울호 <신작소시집/ 작품론> 에서

  * 손택수/ 전남 담양 출생, 1998년《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나의 첫 소년』등

  * 신동옥/ 전남 고흥 출생, 2001년『시와반시』로 등단, 시집『밤이 계속될 거야』, 비평집『기억해 봐, 마지막으로 시인이었던 것이 언제였는지』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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