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지옥
이근일
식물의 그림자에 잠정이 묻어났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알 수 없는 그날의 상황이.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왜 그런 모욕을 당해야만 했는지. 도대체 너는 얼마나 오랫동안 나에 대한 증오를 키워온 것인지. 혹 언젠가 내가 무심코 던진 그 말 때문이었을까. 내게는 이제 말라 부스러진 유충 껍질 같은 그 말 한마디가, 깜깜하고 가시 돋친 그날의 네 복수를 키운 것인가. 그렇다 해도, 고작 그 정도 연유로 날 옥죄고 한순간 지옥에 빠뜨린 널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런데 저 식물 역시 이런 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구나. 볼온한 식물을 보내온 네 저의는 무엇인가. 나는 아직 모르겠다. 매사 물을 잘 주고 다독이는 마음으로 살다 보면, 전처럼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너와도 다시 아무렇지 않게 지내게 될까. 더욱 옥죄거나 지옥에 빠지는 일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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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아돌하』 2019-겨울호 <신작시> 에서
* 이근일/ 경기 고양 출생, 2006년『현대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아무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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