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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에 대한 백서(부분)_어떻게 쓰는가/ 오세영

검지 정숙자 2024. 1. 28. 02:29

 

    내 시에 대한 백서(부분)

 

     오세영

 

 

  3. 어떻게 쓰는가

  세간의 작용이 발생하는 것은 모두 아집我執에서 생긴다. 자아에의 집착을 제거하면 세간의 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 [『화엄경』 제22장「십지품十地品」]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경전』에는 여러 좋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중에서도 『화엄경』에 있는 경구를 마음에 새기고 삽니다. 시창작의 본질을 설파해주는 촌철의 비의秘意가 적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내게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출한 것을 시라 믿습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씁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의 주체이지요. 주체가 진실하지 못하다면 '생각' 역시 진실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도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지 않으셨던가요. '내'가 없는데 어찌 그 안에 품은 생각이나 감정이 진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언어로서는 진실을 지시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다 하시지 않았습니까(不立文字  言語道斷  直指人心  敎外別傳  見性成佛).

  그러므로 결론은 이렇습니다. '나'라는 주체는 없습니다. 그러니 내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은 내가 무로 돌아간 상태 속에서의 그 어떤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것'이란 또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얻은 깨달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까닭에 본질적으로 불교의 경전들은 모두 시적詩的이며, 모든 선사禪師의 깨달음은 마치 게송偈頌이 그러하듯 시의 형태로 진술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통속적으로 선시禪詩라 부르는 바로 그것입니다.

  시는 '내'가 쓰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 든 것을 '내'가 표출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시는 '내'가 없는 상태에,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쓰여집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아'의 산물입니다. 무아의 상태가 되어 절대 자유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홀연히 도래하는 어떤 한 찰나의 밝은 빛, 그것이 시입니다. '시인'이란 다만 그것을 언어로 받아 적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시는 시인이 쓰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혹은 사물이 씁니다. 삼라만상 제법諸法이 쓰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작업이란 일상적 자아를 벗어나 어떤 참다운 자아를 찾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일상에 대한 관심, 일상과 맺은 이해관계, 현상의 '나' [가아假我나 실아實我]를 구성하는 여러 인자들 편견이나 감정은 물론 지식이나 습관, 경험, 인상, 기억, 교훈 등을 모두 깨끗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는 아마도 어는 한 순간 비로소 의식이 순수해진 어떤 텅 빈 상태에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소위 의식의 제로 상태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맑은 물도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순물들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순수한 물 즉 증류수가 되는 것처럼···.

  물론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다음 차례로 시인은 의식 그 자체를 넘어서야 합니다. 내가 있다는 의식, '나'로서 생각하고 '나'로서 사유하고 '나'로서 느낀다는 의식을 벗어나, 있으면서도 없는 나 즉 불가佛家에서 이르는 바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서야 합니다. 그때 그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어떤 깨우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 적은 것이 바로 시입니다. 하이데거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존재가 무로 환원Deduktion된, 어둠 속에서 홀연 비치는 일순의 찬란한 광휘光輝, 그것은 오직 어떤 특별한 언어, 시 이외에는 달리 현현시킬 수 없다고···. 이미지, 비유, 상징으로 쓰여지는 언어 말입니다. 『경전』에서도 "모든 지혜 있는 자는 비유에 의해 깨달을 수 있다"고 가르친 바 있습니다. (『화엄경』, 「비유품譬喩品」제 3장)

  『화엄경』의 말씀, '자아의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앞서의 가르침은 물론 생사의 도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나는 그것을 항상 내 시작의 금과옥조로도 삼고 있습니다. (p. 32-34)

 

   * 블로그 註: 1. 왜 쓰는가(p. 31) //  2. 언제 쓰는가(p. 32)는 책에서 일독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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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문학』 2023-11월(657)호 <이 시대 창작의 산실/ 내 시에 대한 백서> 에서

  * 오세영/ 1942년 전남 영광 출생, 전남의 장성과 광주, 전북의 전주에서 성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과 졸업. 1965~68년 박목월에 의해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사랑의 저쪽』『바람의 그림자』『마른 하늘에서 치는 박수 소리』등 시집 27권과 『시론』『한국현대시 분석적 읽기』등 학술서적 및 산문집 24권이 있음. 시집『밤하늘의 바둑판』영역본은 미국의 비평지 Chicago Review of Books에 의해 2016년도 전 미국 최고시집(Best Poetry Books) 12권에 선정되었음. 영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 체코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된 시집이 있음. 서울대학교인문대학교수 역임.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