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외 1편
김윤
지는 해를 보다가
나도 저물다가
주머니에 손 넣으면
조선 칼 하나 있다
날은 닳아서
서러운 아무 것도 베이지 않고
상처는 질겨서 찢겨질 때
내 속에서 누군가
자꾸 사랑이라고 항변할 때
칼에 독이 있다
목숨 바꾸어 베어 낼 무엇이
틀림없이 내게 있었던 거다
날이 제 힘을 다하느라 상했다
이제 벼리지 않을 거다
큰 절 아래 골목에
오래된 대장간이 있어서
젊은 장인이
금방 나온 쇠를 허공에 몇 번이고 세워보면서
흰 날을 일으켜 붙잡는다
칼긑을 담금질하는
치밀한 시간
꽃이 지고 봄이 가고
날 끝에 파랗게 독이 섰다
베어야 할 것들이
문득 다 사라졌다
-전문(p.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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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자
거긴 언제나 밤이어서
그는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귓바퀴 뒤쪽 물렁뼈를 타고
칠흑 같은 슬픔이 쏟아졌다
빗소리가 들렸다
금 귀걸이를 하고
금박 허리띠를 두른 여자가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누워있었다
허벅지 뼈가 얇고 근육선이 발달한
말을 잘 타던 삼십대 여자는
아직도
근사한 마구 일습을 갖고 있었다
이십대 남자는 여자의 오른편에
비스듬히 엎드렸다
여자는 귀족이고
남자는 순장殉葬되었다
천 오백년 전에도
지금처럼
생계형 순장조가 있었을까
-전문(p. 54-55)
* 경주 황남동에서 5세기 무렵의 남자와 여자 인골 2개체가 아래위로 버스듬히 겹쳐져 발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이십대 남자를 순장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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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기억은 시리고 더듬거린다』 에서/ 2023. 11. 20. <서정시학> 펴냄
* 김윤/ 전북 전주 출생,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지붕 위를 걷다』『전혀 다른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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