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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외 1편/ 김윤

검지 정숙자 2023. 12. 11. 02:15

 

    외 1편

 

    김윤

 

 

  지는 해를 보다가

  나도 저물다가

  주머니에 손 넣으면

  조선 칼 하나 있다

 

  날은 닳아서

  서러운 아무 것도 베이지 않고

  상처는 질겨서 찢겨질 때

  내 속에서 누군가

  자꾸 사랑이라고 항변할 때

 

  칼에 독이 있다

  목숨 바꾸어 베어 낼 무엇이 

  틀림없이 내게 있었던 거다

 

  날이 제 힘을 다하느라 상했다

  이제 벼리지 않을 거다

 

  큰 절 아래 골목에

  오래된 대장간이 있어서

  젊은 장인이

  금방 나온 쇠를 허공에 몇 번이고 세워보면서

  흰 날을 일으켜 붙잡는다

 

  칼긑을 담금질하는

  치밀한 시간

  꽃이 지고 봄이 가고

  날 끝에 파랗게 독이 섰다

 

  베어야 할 것들이

  문득 다 사라졌다

      -전문(p.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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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장자

 

 

  거긴 언제나 밤이어서

  그는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귓바퀴 뒤쪽 물렁뼈를 타고

  칠흑 같은 슬픔이 쏟아졌다

 

  빗소리가 들렸다

 

  금 귀걸이를 하고

  금박 허리띠를 두른 여자가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누워있었다

  허벅지 뼈가 얇고 근육선이 발달한

  말을 잘 타던 삼십대 여자는

  아직도

  근사한 마구 일습을 갖고 있었다

 

  이십대 남자는 여자의 오른편에

  비스듬히 엎드렸다

  여자는 귀족이고

  남자는 순장殉葬되었다

 

  천 오백년 전에도

  지금처럼

  생계형 순장조가 있었을까

   -전문(p. 54-55)

 

   * 경주 황남동에서 5세기 무렵의 남자와 여자 인골 2개체가 아래위로 버스듬히 겹쳐져 발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이십대 남자를 순장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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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기억은 시리고 더듬거린다』 에서/ 2023. 11. 20. <서정시학> 펴냄

   * 김윤/ 전북 전주 출생,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지붕 위를 걷다』『전혀 다른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