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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이 중요한가? 시집이 중요합니다(부분)/ 김언

검지 정숙자 2024. 2. 18. 15:05

<issue>

   

    등단이 중요한가? 시집이 중요합니다(부분)

 

     김언

 

 

  등단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을 배려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는 이 용어에 대해 누군가는 다시 딴지를 걸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미등단이라는 말과는 어떤 실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냐고요. 어감이 조금 달라졌을 뿐 비등단과 미등단, 이 둘을 체감하는 입장에서는 실제로 별다른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괜히 배려하는 척 허울 좋은 용어로만 대체해서 부르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마치 '지방'을 대신하여 '지역'이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고 해서 서울 중심의 구도에서 소외된 지방의 현실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듯이, 미등단 대신 비등단이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등단하지 않은 이들의 현실적인 여건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 까요? 비등단자든 미등단자든 등단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써 나가야 하는 처지는 어떻게 불러도 별 차이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비등단 상태로 첫 시집을 준비하여 출간한 경우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집니다. 우선 시집을 출간한 이후부터는 비등단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을 이유가 없습니다. 기존의 등단 절차, 그러니끼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집을 출간하면서 시단에 등장하는 것도 엄연히 등단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공신력 있는 출판사에서 엄격한 심사와 검증 절차를 거친 후에 시집을 출간한 경우라면, 어지간한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한 등단보다 더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실제로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한 등단은 겨우 몇 편의 작품으로 심사받는 과정을 거치지만, 시집 출간을 통한 등단은 말 그대로 시집 한 권 분량의 원고로 평가를 받아야 하므로 고려되는 지점이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짚어 보자면, 개벽 작품의 완성도와 특이성,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더하여 시집 한 권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선명하게 보여 주는가가 출간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들어갑니다. 즉 뚜렷한 시 세계를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가 시집으로 등단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겠습니다.

 

    *

  정리하면, 시집이라는 하나의 이정표를 향해서 최대한 길게 내다보면서 작품을 쌓아 가는 일. 그것이 등단과 상관없이 시의 길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시집을 낼지 장담할 수 없으나 단 한 권이라도 더 좋은 시집을 내고 싶은 입장에서 고집스럽게 되새겨 온 말이라는 점도 사족으로 붙여 둡니다. 시의 길에서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다음에 쓸 시, 다음에 낼 시집, 다음에 개척할 시 세계가 시인에게는 관심사의 전부입니다. 앞만 보고 가는 길에서 과거의 시는 이미 나의 시가 아닙니다. 앞으로 써질 시가 나의 시의 전부입니다. 그걸 믿고서 묵묵히 전진하는 이가 어쩌면 시인일 겁니다. (p. 118-119 * 1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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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파란』 2023-겨울(31)<issue> 에서  

  * 김언/ 19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숨 쉬는 무덤』『거인』『소설을 쓰자』『모두가 움직인다』『한 문장』『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백지에게』, 산문집『누구나 가슴에 문장이 있다』, 시론집『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평론집『폭력과 매력의 글쓰기를 넘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