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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학술서『정당화의 철학』'삶은 오로지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검지 정숙자 2023. 1. 11. 03:03

 

    박찬일 학술서_ 『정당화의 철학』 / 발췌 부분들

      - 니체 『비극의 탄생』

 

 

  * '삶은 오로지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p. 287)

  

  *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변명』, 『크리톤』, 『파이돈』에서, 특히 『변명』에서   비극적 죽음을 본 것은 벤야민이다. 비극적 죽음인 것은 '의무로서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국가 법, 즉 국가 신학에 의한 죽음을 포함한다. 시민 신학   국가 신학은 국가를 절대시하는 것으로서 형이상학과 무관하다. 구제와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형이상학이 없다. 이건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완전한 죽음'에서 그렇다고 완전히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를 위한 죽음은 무지막지한 인간 윤리학의 한 부분으로 고려될 수 있다. 기독교를 위한 죽음, 즉 순교의 유비로 볼 수 있다. '무리 본능'이 만든  것으로서 국가, 그 국가를 위한 죽음은 물론 니체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강자der Starkere에 의한 원한감정이 무리들을 부추겨 기독교를 앙양하듯이, 강자에 의한 원한감정이 무리들을 부추켜 민주주의국가   사회주의국가를 앙양한다. '민주주의   사회주의'에도 노예계급이 필요하다. (p. 254)

 

  * '정당화'에도 조건이 있다. '약한 정당화'    강한 정당화를 말할 수 있다. 자연주의적 '예술', 예술 냄새가 안 나는 예술, 즉 아우라를 느끼기 힘든 '복사複寫' 예술을 통한 정당화가 약한 정당화이다. 생      사의 고통을 (자연주의 예술) 자연주의적 인간의 삶을 통해 보여줄 때, (자연주의의 예술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생      사의 고통을 보여줄 때, 그것은 생      사의 고통에 대한 약한 정당화이다. 혹은 생      사의 고통의 이중적 되풀이로서, 생      사의 고통을 이중적으로 겪게 하는 것과 같다. 이에 반해 신들의 삶이 인간의 삶을 사는 것을 보여줄 때, 신들이 인간의 생      사에 버금가는 삶을 사는 것을 보여줄 때, 그것은 생      사의 고통에 대한 '강한 정당화'이다. 신들에 의한 생      사의 고통이 인간의 생      사의 고통을 강하게 정당화시킨다. (p. 260-261)

 

  * 니체 철학의 '선취'는 『비극의  탄생』 3장에서도 압도적이다. 3장 앞에서 악을 정당화하고, 고통을 정당화하는 올림포스 신들을 말할 때 이는 기독교 우일신에 대한 간접적 비판이다. [인간의 삶을 정당화하는 올림포스 신들을 말했고, 인간의 삶을 정당화하지 '않는' 기독교의 유일신을 말했다] 여기에서도 특유의 니체 논법이 적용됐다. 인간의 악덕을 올림포스 신들이 똑같이 살면서 인간의 삶을 정당화하는 것이 A를 A로 대응하는 방식이고, (기독교 형이상학 등이) 인간의 악덕에 대해 도덕 금욕 의무 등을 강조하고 도덕  금욕  의무에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이 A를   A로 대응하는 방식이다.

  '고통의 재능'을 말할 때 이것은 니체 본인에게도 해당된다. 그리스인들이 고통의 재능을 가진 만큼 그들의 올림포스와  서사시와 비극예술을 만들었고, 니체가 고통의 재능을 가진 만큼 올림포스와 서사시와 비극예술을 해석했고, 그의 철학을 정당화의 철학으로 명명하게 했고, 마찬가지로 고통의 재능으로 '신들'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려 그이 고유한 형이상학적 보충물을 주조했다. '고통'의 철학의 다른 말이 정당화의 철학이다. (p. 268-269)

 

  * 니체의 예술 형이상학에는 아폴론적 단계가 포함되고, 이오니소스적 단계가 포함된다. 니체가 인용 후반부에서 "아폴론적 단계appolinische[n] Stufe"를 굳이 말한 것은 디오니소스 단계를 의식한 것이다. '인생은 오로지 미적 현상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는 니체 고유의 예술 형이상학의 격률에서 '미적 현상'에 아폴론적 미적 현상이 포함되고, 디오니소스적 미적 현상이 포함된다. 니체의 예술 형이상학은 호메로스 서사시에서 전개된 아폴론적 꿈 예술에 관해서이고, 무엇보다 전성기 그리스비극에서 전개된 디오니소스적 도취 예술과 아폴론적 꿈 예술에 관해서이다. 전성기 그리스비극에서 압도적인 것이 디오니소스적 도취 예술이었고, 쇠퇴기의 그리스비극에서 (상대적으로) 주도적인 것이 아폴론적 꿈 예술이었다. (p. 275)

 

  * '삶은 오로지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니체의 예술관으로서, 여기에도 니체 특유의 대응방식 'A에 대한 A로서의 대응'이 나타난다.이를테면 불투명한 세상에 대해 불투명한 예술로 대응하는 것이다.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관계의 세계를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관계의 예술로 대응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들을 그대로 따라 하면 '내부와 외부가 없는 것으로, 서술할 수 없는 것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형식"   "체계"가 없는데, 체계를 세우는 것은 니체 풍으로 말할 때 '하나의 망상이다.' 아폴론적 영상[형상, 꿈]의 언어가 비유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언어, 아르킬로코스의 서정시 '언어', 아이스킬로스 드라마에서의 '언어' 모두 이 세상에 대한 비유이다. 비유가 아닌, 사물의 표상,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언어는 비유를 필요로 한다. (p. 287)  

  

  * 애플이 자율주행 전기차를 만든다. 농가農家가 아닌 실험실에서 식량을 만든다. 맞춤형 식량을 만든다. 넷플릭스가 '게임' 시장에 뛰어들었다. 2차원 인터넷이 아닌 3차원 메타버스Metaverse[확장현실 eXrended reality]에서 산업은 모두 소프트웨어 기반 산업이 된다. 모든 것의 '디지털 전환'은 문자의 시대가 가고 숫자의 시대가 가시적으로 육박했음을 알린다. 17세기 과학  기술  수학 혁명 이래 비가시적 '암묵적 소문'이던 것이 실상으로 자리잡은 것을 말해야 한다. 코로나 시대에 '하루 확진자 수', 혹은 코로나에 의한 하루 사망자 수(수 는 낯선 용어가 아니다. 일시적 용어가 아니다. 코로나는 문자로 자리잡은 것이 아니라, 숫자(혹은 숫자 용어)로 자리 잡았다. (p. 297-298)

 

  * 칸딘스키의 추상예술이 물자체를 드러내려고 시도하고, 칸딘스키 회화를 보는 사람이 물자체를 감득하려고 시도한다. 생산자   소비자 모두 직관에 의해서이다. 순간적으로 중지中止가 발생하고, 자기로부터의 거리distance 및 일탈이 발생한다. 메타인지, 성찰, 탈맥락화Enttextualisier-ung가 그것에 대한 수용미학적(감상자 차원에서의) 명명이다. 고도로 추상화(?)된 예술인 음악에서도, 직관에 의한 것으로서, 중단 및 거리가 순간적으로 발생하고, 마찬가지로 순간적으로(혹은 찰나적으로) 메타인지가 발생하고, '탈맥락화된 인생' 같은 것이 발현된다. (p. 306-307)

 

  * 미친 바다 위에,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고, 울부짖듯 산더미 같은 파도를 들었다 놨다 하는 미친 바다 위에, 거룻배를 탄 뱃사람 하나가 그 빈약한 탈것을 의지하여 앉아 있는 것처럼, 고통의 세계 한가운데에 개별자가 개별화의 원리를 믿고 의지하며 조용히 앉아 있다.(『비극의 탄생』1장, 32;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63장) (p.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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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찬일_학술서 『정당화의 철학』/ 2022. 2. 28. <푸른사상사> 펴냄

 박찬일朴贊一/ 1956년 강원 횡성 출생, 학술서『독일 대도시시(詩) 연구』『브레히트 시의 이해』『멜랑콜리커들』『시대정신과 인문비평』등, 평론집『해석은 발명이다』『사랑, 혹은 에로티시즘』등, 번역서『삶의 한가운데』『검은 토요일에 부르는 노래』『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등, 시집『나비를 보는 고통』『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모자나무』『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인류』『북극점 수정본』『중앙 SUNDAY-서울』『아버지 형이상학』등, 연세대 독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독일 카셀대학 박사후과정 마침. 현) 추계예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