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숲으로의 초대(부분)
양수덕/ 시인
그는 길을 떠나면서 눈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눈은 내릴 때가 가장 좋은 것이다.'
눈은 순간의 미학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내리는 모습이야말로 더없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그것이야말로 눈의 축제라고. 회색빛 세상을 지워 새로 탄생한 그 하얀 빛을 마주하는 기쁨을 벅차게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눈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선명하게 남기는 즐거움도 맘껏 누리고 싶었다.
그는 눈 숲으로 향했다. 내리는 눈에 목말라하고 있을 때 마침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를 위해서 눈들이 하늘 길을 타고 서둘러 내려오는 듯했다. 그는 눈을 맞으며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풍요로움으로 가슴이 벅찼다. 그의 소리 없는 탄성이 허공을 울렸다. 이 장면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는 마음을 환하게 열어 눈을 맞이했다.
그는 점점 더 눈의 깊은 정서에 빠지고 있었다. 숲에는 눈살을 붙인 나무들이 빽빽하게 그를 맞이했다. 함박눈이 어느새 하얀 빛의 향연을 펼쳤다. 그리고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눈은 천지를 새하얗게 뒤덮었다. 신비한 눈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들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있는 듯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느낄 만큼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다른 세계로 빠져가는 기분이었다.
그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을 때 눈앞에 무언가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가 보니 하얀 여우였고 놀라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여우는 그를 보더니 말을 했다.
"반가워요."
그는 여우가 말을 하는 걸 알고 너무 놀랐으며 자기를 해칠까 봐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온통 눈으로 만든 여우였다. 눈여우가 말을 이었다.
"사람도 아닌데 말을 해서 놀랐지요? 이 나라에서는 모두가 말을 해요."
"말을? 어떻게? 내가 어떻게 이런 이상한 곳에 들어왔나?"
"그러니까 당신은 행운이지요."
"여우야, 어떻게 된 건지 말해 줄 수 있니?"
"때가 되면 알게 돼요.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눈으로 되어 있어요. 여기에 함정이 있는 거예요."
"음, 모두가 눈으로 만들어졌다니 정말 신기하구나. 그럼 눈이 녹으면 너도 사라지니?"
눈여우는 급히 말을 이었다.
"그런 슬픈 말을 하면 안 돼요. 더 이상······. 왜냐하면, 음 음, 왜냐하면······"
"슬픈 말이겠지 너한테는. 그래 더 이상 안 할게."
눈여우는 안심이라는 듯 짧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앞으로 여기에 사는 모든 것들을 만날 거예요. 누굴 만나든 상대가 슬퍼할 말은 안 하는 게 좋아요."
"알았어. 잘 생각해 보고 말할게."
"그럼 난 갈 거예요. 즐거운 여행 되세요."
"그래 고맙다."
그는 눈여우가 사라진 쪽을 잠시 지켜보다가 발길을 옮겼다. 눈은 쉬지 않고 내렸고 그는 자신이 대체 어디에 온 건지 이상하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에 홀린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좋아하는 눈이 오고 있다는 현장감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때 그의 눈에 띈 것은 다리였다. 다리를 건너려 하다가 눈으로 만든 다리라는 것을 알고는 멈칫했다. 건너다가 잘못하면 무너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말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나를 건너가도 안 무너지니 건너가세요. 그냥 조용히요."
그는 다리가 말을 하는게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 몸이 굳는 것 같았다.
"많이 놀라시는군요. 당신은 무슨 마법에 걸린 게 아니라 특별한 나라에 들어온 거예요. 우리는 어느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어요. 마음을 읽으니까요."
"그런가? 참 신가하네."
"하하하. 당신에게는 신기한 일이겠지만 내가 눈길 한 번 준 것 뿐인데요."
"그런데 정말 너를 밟고 지나가도 되겠어? 튼튼해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말하자면 금방 무너질 것 같아서······"
"쉿, 말조심하세요. 자꾸 의심하면 정말 내가 무너질지 몰라요. 그러면 당신은 계곡의 험한 물을 건너갈 수 없어요. 이왕 이 나라에 왔으니 구경이라도 해야 하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물 건너 산 넘머 가는 데까지 가 봐야지. 참 고마운 다리구나."
"헤헤, 제 역할이 좀 돋보이죠? 세상의 다리들은 모두 공덕을 쌓고 있지요. 누구나 다 다리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당신도요."
"그래. 나도 누군가의 쓸만한 다리가 되었으면 해. 생전 처음으로 이런 기특한 생각을 다 하네."
그는 눈다리를 힘차게 건너갔다. 눈 위에 그의 발자국만 남았을 뿐 눈다리는 헐어진 흔적이 없었다. 그는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보니 나무들도 하나같이 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섬세하기가 실물과 똑같았다.
'정말 여긴 뭐든지 눈으로 돼 있나 보네.'
그는 잠시 쉬어가려 나무 밑에 앉았다.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작은 나무가 보였다.
'나무들이 서로 섞여 사는 게 인간 세계와 다를 게 없지. 그렇지만 키 큰 나무가 작은 나무를 우습게 보진 앟겠지. 키가 작다고 작은 나무가 불평을 하는 것도 아닐 테고.'
그때 말소리가 들려왔다.
"맞아요. 우린 인간들 하고는 달라요. 키가 크고 작고, 돈이 있고 없고, 아 참, 우리에게 돈은 쓸모가 없지? 하하, 힘이 세고 안 세고······ 뭐 이런 건 아무 문제가 안 돼요. 인간은 우리 나무들에게 배워야 해요."
"그렇구나. 인간들이 나무만도 못 하구나."
작은 눈나무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키 큰 나무들 사이에 낀 나를 보고 순간 부정적인 생각을 했을까 봐 아까는 놀랐어요. 그건 우리에게 치명적이지요."
아, 그런가? 근데 알 것 같기도 하면서 잘 모르겠네."
"그럴 거예요. 나중에 확실히 알게 되겠지요."
"그렇게 될까?"
"그럼요. 안녕히 가세요."
"그래. 고맙다."
그는 일어나 다시 걸었다. 걷다 보니 어디선가 그윽한 꽃향기가 피어나는 듯했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눈꽃을 발견했다. 눈으로 빚은 꽃송이가 탐스럽게 피어나 향기를 빼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p. 15~20)
작가의 말> 한 문장: 눈을 소재(배경)로 한 열 개의 단편 소설들은 눈의 고향으로 가는 짤막한 여정이다. 그것은 눈의 근원을 찾는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의 속성인 소멸, 순수, 정감의 분위기, 풍요로움, 유년의 추억, 동화적 정서, 몽환의 가능성 등을 이야기하려 했다.
그중 두드러진 정서는 소멸로서 사라짐과 죽음을 의미한다.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 소멸과 사라짐의 풍경에는 슬픔과 허망함이 녹아 있다. 그러나 눈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소멸과 사라짐도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끌려 궁극적으로는 슬픔을 정화하려는 끈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몽환적 이미지는 눈의 가장 매력적인 정서라고 생각한다. 판타지가 가능한 이유이다. 우리의 메마른 마음이 마음껏 가상 현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믿기에. (p. 206-207)
--------------------
* 양수덕 단편집『눈 숲으로의 초대』 2022. 11. 30. <천년의 시작> 펴냄
* 양수덕/ 200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시 부문 등단, 시집『신발 신은 물고기』『가벼운 집』『유리 동물원』『새, 블랙박스』『엄마』『왜 빨간 사과를 버렸을까요』, 산문집『나는 빈둥거리고 싶다』, 소설집『그림쟁이 ㅂㅎ』, 동화『동물원 이야기』등
'여러 파트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찬일 학술서『정당화의 철학』"인생의 정당화가 정당화 철학의 핵심 내용이다" (0) | 2023.01.09 |
---|---|
양수덕_단편집 『눈 숲으로의 초대』/ 눈사람 엄마(부분) (0) | 2022.12.31 |
나무는 매미의 집/ 엄창석(소설가) (0) | 2022.10.29 |
박상륭 장편소설『죽음의 한 연구』/ 발췌 셋 (0) | 2022.09.22 |
페이지 대 스테이지 : 은퇴한 슬램 시인의 고백(부분)/ 제이크 레빈 (0) | 2022.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