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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연구가/ 한명희

거미줄 연구가      한명희    우리 아버지  거미줄 연구가였지  거미를 키운 적은 없어도  거미줄에 대해 박식했지   날벌레가 어떻게 거미줄에 걸려드는지  거미줄에 걸려든 날벌레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알려주셨지  아니 알려주고 싶어 하셨지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다 집 밖에 있었네  집은 너무 습하고 많이 어두웠다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저는 요즘 그물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요  거미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그래도 우리 아버지  거미줄이 기본이라고 했지  큰 날벌레는 다 놓치고 마는  거미줄의 무기력을 얘기할 때  아버지의 목소리는 거미줄보다 희미했네   말년에 아버지는 탑에 대해 연구했지  아버지의 연구대로라면  아랫돌들은 윗돌의 하중을  견디고 있는 것이었지  돌탑이 아니라 쇠탑이..

투명 비닐우산/ 최진자

투명 비닐우산      최진자    장마가 시작되려 비를 뿌렸다  시야가 보이는 맑은 비닐우산을 폈다  펼쳐진 우산은 민무늬가 아니라  박제된 벚꽃 우산으로 변해 있었다   지난봄 비보라 칠 때  닭 털 뽑히듯 참혹하게 떨어진 꽃잎  고운 몸 유리 같은 수의에  몸을 누인 꽃잎이 문양이 되었다   벚꽃 우산을 쓰고  단풍나무 밑에서 올려다보았고  백합나무 옆으로 가 비춰보았다  다시 벚나무 밑으로 가니  비로소 꽃과 잎이 서로 알아보는 순간   벚나무 잎에 맺혔던 빗방울이  경쾌하게 물풍금 소리를 내며  비닐에 붙어 있던 꽃잎을 끌어안았고  물방울이 진주알처럼 자리잡았다     -전문(p. 144)   --------------------------  * 『시현실』 2023-겨울(94)호 에서  * 최..

기면(嗜眠)/ 이재훈

기면嗜眠     이재훈     도로가 빙빙 돌고 앞이 안 보인다.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막힌다.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하여 주변을 빙빙 돈다.  맥주를 마시면 버스를 타지 못한다.  온몸에 서슬이 돋고 입술이 파래진다.  낭떠러지에 차가 굴러 떨어진다.  창자가 땅에 모두 쏟아지고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진다.  홀로 순댓국집에 들어간다.  남루한 옷을 입고 가면을 뒤집어쓴다.  방충망에 매미가 붙어 있다.  비바람이 불자 날개 껍질이 흩어진다.  지렁이는 아스팔트 위에서 몸이 찢겨진다.  도처에 칼과 도끼가 넘쳐난다.  새빨간 눈을 가진 들개가 무릎 위로 튀어 오른다.  독사가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가슴에 똬리를 튼다.  원하는 것은 땅에 없다.  마음에 가질 것은 경륜이 아니라 자유다.  길가에 핀 버..

포렌식 금지령/ 윤정구

포렌식 금지령      윤정구    얼음장 풀리는 봄강에서  지난겨울 말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모두 놀랐다   (이놈 보아라, 이제는 뻔한 거짓말도 하고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죽이고 가세."  "아니, 아직 창창한 나이인데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나?  한때는 우리와 함께 공부한 친구가 아닌가?"   뚜렷이 들리는 소리에 기가 막혔네  그 친구가 없어진 것이 놈들의 짓이던가   옳거니, 이제 광희문 느티나무에게서 600년을 복원할 수 있으리  그 후로는 돌돌돌돌 흐르는 물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늙은 고목나무에 귀 기울여 본다네   그 느티나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네  포렌식만 할 수 있다면 단박에 비밀을 알 수 있지  천지신명은 서둘러 포렌식 금지령을 내릴 수밖에 없..

가을 깊은 집/ 윤정구

가을 깊은 집       「추성부도秋聲賦圖」* 속을 거닐다     윤정구    단원이 죽기 전에 그렸다는 추성부도에 달이 떴다   (무성해진 것들을 숙살肅殺하러 온 가을바람 소리다 구양수歐陽修가 동자를 불러 누가 왔는가 기척을 살피게 하니 별과 달은 밝고 맑은데 소리는 적막한 나무들 속에서 난다 한다 슬프다 가을 나무여 어찌 죽음의 엄혹함을 견디려는가···*)   구양수가 본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나,  예순한 살 단원이  700년 전 구양수의 쓸쓸한 마음을 그린 추성부도에서  찌륵찌르르륵 풀벌레 소리가   졸고 있는 동자의 달빛마당에 가득 차 출렁거리는 사이   다시 300년이 흘러갔다  죽은 세상을 오가는 귀신들에게는 1,000번의 가을이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간다  엄혹한 가을바람뿐이 아니다.  숙살을..

디지털 강산, 드넓은 세상에서 노닐다/ 유병배

디지털 강산, 드넓은 세상에서 노닐다      유병배    박물관 신국보보물전 전시실  강과 산 그리고 그 시절의 사람들이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화폭에 끝이 펼쳐진다   '어럴럴 상사디야···' 어디선가 들려오는 선소리꾼이 메기는 소리  곡선으로 휘어진 디지털 영상 스크린이 열리자  그 시대의 사람들이 뛰어나와 춤사위를 벌인다  "강 산 무 진 도"  글자가 물결을 타고 흘러간다   스크린이 잠시 숨을 돌리자  두루마리 횡권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두루마리를 따라가니 18세기 후반 정조 임금 시절이 나타난다  펼쳐진 세상 위에 길이 흐르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부산하다  풍요로운 세상  사뿐히 날아다니는 아이들  그림과 영상과 음악이 관객과 한데 어우러져  신명나는 세상으로 빠져들고  그 시대 사람들의 ..

야유회/ 유자효

야유회     유자효    방송을 주름잡던 언론인은 귀가 들리지 않는다 했다.  필봉을 휘두르던 언론인은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했다.  모두가 더 늙어 있었다.  먼저 떠난 사람들의 얘기를 했다.  어느새 흔한 일이 되어 있었다.     -전문(p. 120)  --------------------------  * 『시현실』 2023-겨울(94)호 에서  * 유자효/ 1968년 ⟪신아일보⟫에 시 & ⟪불교신문⟫에 시조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시간의 길이』등

등불을 켜다/ 문현미

등불을 켜다        서대문형무소     문현미    바깥은 호기심으로 들뜬  인파들의 긴 행렬로 소란스럽다   역사의 공간에 발을 딛고 있는 내내  먼 곳의 당신에 대한 생각이 허기처럼 타올랐다   발화점을 낮추어 보려 해도  끓어오르는 슬픔, 분노, 수치의 불꽃들   겨우 억누르고 잠재우고 얻은  고요의 제단 앞에서   함부로 짓밟혔던 시대를 거슬러  바로 곁에 당신의 숨소리 들리는 듯  두근거리는 감정의 파동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의  기름을 오롯이 쏟아부어  사위지 않는 등불 하나 공손히 바친다   무저갱의 옥사에서  견디고 지켜냈던 마음의  높고 빛나는 강철의 시간을 위하여     -전문(p. 93-94)  --------------------------  * 『시현실』 2023-겨울..

직지(直指)/ 김정자

직지直指     김정자    프랑스 국립도서관 관계자가  책 한 권을 들고 나왔다.  무거운 쇳덩이를 들고 있는 듯  혹은 너무 가벼워 날아갈 듯 조심스럽다.   부양浮揚하듯  아니, 부양扶養하듯  만인 앞에 내보였다.   오래된 책  아주 오래된 책은 자신의 무게와  내용을 깊숙이 숨긴다고 한다.  무념이 깃든 책  활자들은 툭 건들면  잠자리처럼 홀씨처럼 날아갈 듯 가볍다.   만인이 다 느낀 의미는 가벼워진다.  홀씨처럼 방방곡곡으로 날아간다.   종이는 쇠의 무게를 닮아 천 근의 말을 보관하려 했고  쇠는 종이처럼 가벼워지려 했다.   저 최초의 쇠가 묻은 책은  얼마나 가벼워졌길래  이 먼 타국까지 날아왔을까.  인쇄된 최초의 말(言)  오래된 책은 고향 흥덕사 뒤란의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

유성호_시(詩)라는 '프리웨이'를 향한 첨예한 예술적 자의식(발췌)/ 프리웨이 : 문정희

프리웨이     문정희    나 독수리같이 흘러 다니다가  산타페였던가? 프리웨이 한가운데서  이국 경찰에게 붙들렸다  뒤틀린 손목 붕대로 싸매고  눈물 훔치다가  진짜 프리웨이는 어디 있느냐며 꺽꺽거리다가  신호위반입니다!  이국 경찰이 내 덜미를 잡아 세웠다  나는 붕대 손목을 치켜 올리며  이제야 뭐 좀 해보려는데 해는 지고  시가 겨우 좀 떠오르는데  사방에서 밤이 내려오고 있어요  눈물이 앞을 가려  그만 신호를 못 보았어요   경찰은 멈칫 내 위아래를 스캔하더니   그럼 신호를 바꿔야죠  자, 푸른색! 어서 가세요  이게 인생이요   그날 그는 누구였을까  내 손에 붕대는 여전히 감겨 있고  사방에 저녁이 오고 있는데  프리웨이 신호를 바꿔 줄  그 사람?   -전문(『시현실』 2023-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