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
나지환
<최종 노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처음엔 얇은 물감 같았던 노을이 마침내 십여 분 남짓 타오르는 순간 중에서도 가장 붉고 아름답게 확산하는 순간을 말하지요. 그것은 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게 하고, 옥상에 늘어진 수국이 빛을 붙잡게 합니다.
한편 나는 <최후의 노을>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최종 노을>을 마지막으로 노을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아직 남아 빌딩의 유리벽을 감싸는 환한 자국을 말합니다. 그것은 물웅덩이가 밤의 검은 물이 되기 전까지 품는 밝은 그림자이고, 구름을 지우며 구름의 윤곽을 그리는 빛의 미세함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합니다. <최후의 노을>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마땅히 찾아와야 할 짙은 코발트색 어둠이 몰려오지 않습니다. 먼 물로 돌아가서 쉬어야 할 거위들이 자전거도로에 앉아서 울고 있지요. 간판등에서 태어난 하루살이들이 선회비행을 마치고 다시 간판등 속으로 몸을 던지더니, 또 되살아나 나무를 향해 쏟아지는데 그 모습이 꼭 신호탄처럼 밝아요.
나는 <최후의 노을>이 아니라 <노을의 최후>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제 노을은 흔적조차 없는데 그 환희가 이어져요. 오토바이의 먼 곡선, 고가철도 건너가는 육중한 소리. 끝나는 빛이 없어요. 이상해요. 세상은 밤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요. 이제까지 보았던 아름다운 노을들을 모두 떠올리며 나는 노을이라는 단어가 포괄하지 못한 내 기억의 섬광들을 모두 쏟아버렸어요. 구름들 아직도 번쩍거리는 8시, 9시, 10시가 되어도 노을이라는 말 하나만을 움켜쥐고 공원을 걸어, 달려, 앉아 있다가, 아니면 나는 단지 <최후>를 보고 있는 걸까요?
손에 들고 있는 비닐봉지의 떨림이 끝나지 않고
주차장 차단기의 녹색 빛이 끝나지 않고
개업식 풍선인형의 손짓이 끝나지 않는데
도대체 이 도시의 무엇이 끝나가고 있는 것일까요?
-전문-
▶시작하는 시인들을 위하여(발췌)_김익균/ 문학평론가
나지환의 「최후」는 노을에 대한 시이다. 시적 주체는 노을을 바라보며 "최종 노을", "최후의 노을", "노을의 최후"를 거쳐 마침내 "최후" 그 자체에 대해 알아차린다. "도대체 이 도시의 무엇이 끝나가고 있는 것일까요?" 라는 질문으로 끝맺는 이 시에서 "최후"란 무엇이길래 그토록 "환희"를 불러일으키고 "손에 들고 있는 비닐봉지의 떨림이 끝나지 않"게 하는 걸까?
'최후' 앞에서 우리는 인간적 척도를 벗어난 곳에 존재하는 시공간(심층적 시공간)에 의거해 지탱되어온 곳으로서 우리가 사는 생활세계를 자각한다. 생활세계는 인간의 자기실현, 주체화의 조건이지만 인간의 경험이 각인되어 불가사의한 맥박을 잃지 않고 존속되는 곳인 생활세계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노쇠하고 부패한다. 인간적인 이 세계의 최후를 우리는 알아차릴 수 있는가? 그것을 알아차리는 섬광 같은 순간 우리는 고통과 환히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인은 삶의 고통을 전승하고 생명의 쾌감을 고양하는 전통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비극적인 본질이 인간의 미적 본체를 형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후」를 통해 우리는 아폴론(일신, 日神)과 디오게네스(酒神) 양자의 근원적 예술 충동에 의해 인생을 구원하는 예술의 작용을 본다. 아폴론의 선물인 최종노을에 만족하지 않고, 더, 더를 외치는 「최후」는 디오게네스의 예술이야말로 인간을 고통 중에서 근원적 쾌락을 감수感受하게 하고 근원적인 고향으로 회귀하게 한다.
이러한 감수 역량에 의해 마침내 시적 주체는 이렇게 외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밤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진행 되는 것 같아요. 이제까지 보았던 아름다운 노을들을 모두 떠올리며 나는 노을이라는 단어가 포괄하지 못한 내 기억의 섬광들을 모두 쏟아버렸어요."
시작하는 시인의 신작시가 21세기적인 어떤 징후와 공명하고 있다고 한다면 성급한 말인지도 모른다. 김홍중은 21세기를 근대성의 여러 이념적 제도적 미학적 윤리적 정치적 건축물들이 깨져 변형되는 구조적 파상의 시대라고 하지 않았던가, 좀 더 지켜볼 일이다. (p. 시 38-39/ 론 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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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3-11월(407)호 <2023년 등단 신인특집/ 평론> 에서
* 나지환/ 2023년 『계간파란』으로 등단
* 김익균/ 2010년 『시작』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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