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창문의 역사 외 1편/ 이순주

검지 정숙자 2024. 6. 10. 02:01

 

    창문의 역사 외 1편

 

     이순주

 

 

  창 밖에 산이 있다

  겨울에서 이른 봄까지 나는 순장되다

  창문을 열면 비로소 펼쳐지는

 

  거대한 사서의 하루

  책장을 넘기는 바람의 긴 손가락들 보이고,

  

  봄을 읽는 새소리는

 

  아직 옷장 서랍에 봄이 들어 있다고

  봄의 온도는 잘 개켜진 꽃무늬 티셔츠라고

  여기는

 

  내 손을 잡아 일으킨다

  뺵빽이 꽂힌 나무들이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미래의 도서관

 

  나는 겨울을 밀고

  봄을 잡아당겨 무덤의 문을 열어젖혔다

      -전문(p. 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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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계절은 구석에서 시작된다

 

 

  나는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먼지

  나의 계절은 구석에서 시작된다

 

  구석은 나의 비빌 언덕,

  소라게처럼 떠돌다 만난 불멸의 집 한 채

 

  여기까지 모든 궁리가 구석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나는 구석에 앉기 위해 하루를 서둘러 집에 당도하곤 한다

  나를 앓는

 

  구석에도 감정이 있네

  때로는 음악이 흐르고

 

  그 저녁은 내가 시암 고양이 암컷처럼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쌓인 모래를 털어놓는 시간

 

  나의 입 틀어막으며 제 말만을 늘어놓는 연필 한 자루의, 

  비밀한 숲의 속삭임을 듣는

 

  빈 커피잔은 적막을 들이마신다 

 

  영혼을 들여다보며 다듬기도 하는

  무엇이든 거듭나게 하는 구석의 마법!

 

  내 희망은 그곳에서 자라고 있었으니

 

  그러므로 집구석에 앉아 뭐 하는 일 있느냐고 하는 말은 구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오늘은 시장 골목 난전에 앉아 냉이랑 달래를 파는 노인에게서 봄을 한 봉지 사 왔다 냉이된장국을 끓여 구석에게도 봄 냄새를 한껏 풍기리라

    마음먹은

 

  구석에서부터 나는 시작된다

      -전문(p. 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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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어떤 계절은 구석에서 시작된다』에서/ 2024. 6. 5. <시산맥사> 펴냄

이순주/ 강원 평창 출생, 2001년『미네르바』로 등단,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 2008년 ⟪기독공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목련미용실』, 동시집『나비의 방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