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들의 아침은 화병 속에서 걸어 나온다
이순주
맨 처음 고구마는 내가 읽을 수 없는 문장이었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검은 비닐 봉지 속에서 싹들은 고개를 내밀고
전언은
주둥이가 넓고 엉덩이는 큰 화병에 고구마를 넣고
물을 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고 싶은 말 가슴에 묻고 오죽 답답했을까
화병의 심장이 된 고구마
제 몸을 온전히 잎들에게 내어준다
화병의 날개 같은 잎들이 자란다
하트 모양 둥근 잎들이야말로 내게 하는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
나는 화병과 뜻을 같이하기로 한다
줄기들 창문을 붙잡고 기어오르는
저 날갯짓,
사는 일은 안간힘을 다해 비행을 꿈꾸는 일이 아닌가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에서 나는 방치된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자란 "고구마 잎"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기발하게도 고구마 잎을 "문장"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고구마 잎"에 내게 전하는 암호와도 같은 메시지를 쉽게 해독하지 못한다. 대신 고구마를 화분에 옮겨 심고 "화병"의 마음으로 고구마에 물을 주고 있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고구마를 가꾸던 중, "줄기들 창문을 붙잡고 기어오르는" 고구마 잎을 "날갯짓"으로 파악하여 "하트 모양 둥근 잎들이야말로 내게 하는/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으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곧 "사는 일은 안간힘을 다해 비행을 꿈꾸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고구마 잎과 교감하고 있다. 즉 고구마 잎이 가닿으려는 곳이 천상 즉 우주적인 세계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시인의 말"에서 시인이 문자들과의 결별을 통해 도착하려는 "영원"과 동일한 속성을 지니는 세계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고구마 잎에서 전언을 읽어내는 "나"의 행위는 자연물과 소통하려는 시적 화자의 적극적 의지의 표명이며,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연을 우위에 두는 인식의 정황을 표출하고 있다. (p. 시 78-79/ 론 145-146) <서안나/ 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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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어떤 계절은 구석에서 시작된다』에서/ 2024. 6. 5. <시산맥사> 펴냄
* 이순주/ 강원 평창 출생, 2001년『미네르바』로 등단,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 2008년 ⟪기독공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목련미용실』, 동시집『나비의 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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