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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연_소년문사로 시작한 조숙한 시인의···(전문)/ 서시, 산경표* 공부 : 이성부

서시,      산경표* 공부       이성부(1942-2012, 70세)     물 흐르고 산 흐르고 사람 흘러  지금 어쩐지 새로 만나는 설레임 가득하구나  물이 낮은 데로만 흘러서  개울과 내와 강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듯이  산은 높은 데로 흘러서  더 높은 산줄기를 만나 백두로 들어간다  물은 아래로 떨어지고  산은 위로 치솟는다  흘러가는 것들 그냥 아무 곳으로나 흐르는 것  아님을 내 비로소 알겠구나!  사람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들 흘러가는지  산에 올라 산줄기 혹은 물줄기  바라보면 잘 보인다  빈 손바닥에 앉은 슬픔 같은 것들  바람소리 솔바람소리 같은 것들  사라져버리는 것들 그저 보인다     -전문-     * 산경표山經表: 영조 때 학자 신경준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우리나라 ..

너라는 귀신고래/ 한이나

너라는 귀신고래      한이나    고래를 찾아 무작정 떠난 적 있다   정말 고래를 만날 수 있을까, 멀리 가까이  파도를 뒤적이는 눈길들이 매섭다   하늘과 바다의 파란빛에 들어 있는 저 흰빛  순결과 공포의 색  모든 색의 시작이며 끝인 색  죄없이 바다에 수장된 영혼의 그림자   내가 꿰뚫어 보아야 할 것은 파도의 벽이다   포경선을 타고 망망대해, 내가 찾아  나선 것은 귀신고래  물 위로 딱 한 번 솟아올랐다가 감쪽같이 사라진  너라는 붙잡히지 않는 미래다  포경선에 포획된 것은 빈 투망에 걸린  은빛 물살 한 조각.   아득한 손님 같은 너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       -전문-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

이경철_한국문학 연대를 한 세대 더 늘려놓은···(발췌)/ 그대 있음에 : 김남조

그대 있음에      김남조(1927-2023, 96세)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이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전문-   ▶한국문학 연대를 한 세대 더 늘려놓은 순열한 사랑(발췌)_이경철/ 시인 · 문학평론가  김 시인은 1948년 ⟪연합신문⟫에 시 「잔상殘像」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다. 6.25 전쟁 와중인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무명의, 그러나 총혜聰慧로운 한 처녀..

와각지쟁(蝸角之爭)/ 최도선

와각지쟁蝸角之爭      최도선    전동차 노인석에  두 여자가 일 벌였다   민쯩 까 너부터 까 이것이 어따 반말   진종일 머리채 잡히고도  순환 열차 달린다     -전문(p. 23)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최도선/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3년 『현대시학』 소시집 발표 후 자유시 활동, 시집『서른아홉 나연 씨』『그 남자의 손』『나비는 비에 젖지 않는다』외, 비평집『숨김과 관능의 미학』

이숭원_영성(靈性)의 시인 김남조(발췌)/ 순교 : 김남조

순교      김남조(1927-2023, 96세)    예수님께서  순교현장의 순교자들을 보시다가  울음을 터뜨리셨다  나를 모른다고 해라  고통을 못 참겠다고 해라  살고 싶다고 해라   나의 고통이 부족했다면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련다고 전해라     -전문(『충만한 사랑』)   ▶영성靈性의 시인 김남조(발췌)_이숭원/ 문학평론가  2023년 10월 10일 만 96년간 지켜온 지상의 손을 거두었다. 1950년 처음 시를 발표한 때로부터 73년의 시력이 쌓이고 1953년 첫 시집을 발간한 이후 만 70년 동안 19권의 개인 시집을 문학사의 기록에 남긴 기념비적 생애였다. 『문학사상』 추모 시인론에서 "이로써 한국문학은 시문학의 장엄한 도서관 하나를 잃었다. 그의 삶의 이력은 한국 현대 시사 그 자..

얼굴/ 이온겸

얼굴     이온겸    감정보고서를 적어야 한다   깊은 물 속에 새겨진 이름을 적어야 할까  웃음이 피어났던 눈빛을 적어야 할까  무음으로 통하는 감정의 교차로에서 새벽 4시를 알리고 있다    알람에 놀란 해는  제한 높이 걸려 숨 막히는 턱걸이를 한다   거울 속에 앉아 있던 여자는  시간을 품어 깊게 새겨진 길을 그리고   고단해 보이는 선을  끊임없이 잡고 올라가는 손 밑으로  더위에 지친 고양이는 졸고 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해  쏟아지는 아침을 쓸어담기엔 좁았다     -전문(p. 115)   ---------------------- * 『미네르바』 2024  여름(94)호 에서 * 이온겸/ 2023년『미네르바』로 등단

곤충호텔/ 윤옥란

곤충호텔      윤옥란    습한 계절  먹구름과 천둥소리가 지나가면  뒷산 산벚나무 열매들이 비바람에 떨어진다   이때부터 낡고 오래된 집의 동거가 시작된다   새벽 알람시계가  깊은 잠을 흔들어 깨울 때  재빠르게 침을 놓고 날아가는 모기 한 마리  귓가에 맴돌던 윙윙 소리  잠을 내쫓는 알람보다 매섭다   잠에서 깨면 이불 속에서 무언가 휙 빠져나갈 때도 있다  문단속을 아무리 잘 했어도 언제 들어왔는지  빗자루 찾는 사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수십 개의 발을 지닌 지네 한 마리와  긴 더듬이로 얼굴을 스치고 간 바퀴벌레는 한통속    벽이나 바닥으로 돌아다니는 돈벌레 뒤를 이어  순식간에 부엌으로 날아든 꽃매미가 날개를 접고 있다   우리 집 안팎이 숲이다    낡은 집을 호텔이라고 믿..

갈치/ 최진자

갈치     최진자    네 토막이 난 갈치를 씻으며  다섯 번 칼질 당하므로 여섯 토막이 났을 게다  꼬리와 머리 부분이 없으므로  눈빛을 보지 않아도 되니 안심이다   넓고 푸른 외포항에 갔다가    좌판에 만삭이 된 대구의 피눈물 맺힌 눈을 보고  모성의 아픔이 너한테도 있구나  그 후로 생선의 눈 보기를 피했다   네 모양은 이순신 장군의 긴 칼 같고  쥘부채가 펴진 듯한 지느러미 유연하기는 곡예사이며  아버지의 바닷가 금지령에 헤엄칠 줄 모르는 나  너는 수영선수로 올림픽 금메달감이니  네 몸값이 날로 비싸짐이렷다   심해를 마음껏 휘젓고 폭풍우에도 뛰놀던  별빛 달빛 밝을 때 바다의 은하수로 빛나고  은빛 가루를 몸에 둘러 눈부심  숨이 져도 몸 빛 털어 여성 화장품의 펄로 반짝이며  달밤에 ..

엊그제 일인 듯/ 조은설

엊그제 일인 듯      조은설    누가 백악기 화면의 조리개를 열었을까  잠깐 시간이 정지한 순간  무채색의 기나긴 허공이 지나간다   얇은 균열 속에 파묻힌  또 다른 세상의 문이 열리는데  빛이 환하게 쏟아진다   시조새 한 마리 숲의 잔등에서 솟구쳐 올라  허공에 꾹꾹 눌러 찍는  마름모꼴의 발자국들  휘파람을 불고 있다   달의 갈비뼈 속에서  덧니가 반짝이는 별들이 태어난다  허공이 채워진다    잇몸이 가려운 암모나이트  사랑니가 돋는 계절  모래 한 줌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물장구를 치고 있다   조심조심 한 꺼풀씩  백악기의 고요한 적막을 벗겨내면  엊그제 일인 듯  속절없이 밀려오는 둥근 그리움   그림자 하나 스치듯 지나갔다    -전문(p. 81-82)  ------------..

몽골의 향기 2/ 이채민

몽골의 향기 2      - 게르의 추억      이채민    30분 만에 뚝딱 만들어지는  출입문 하나 달랑 있는   둥근 집이라 해야 할까 방이라 해야 할까   천장에서는 별들의 웅성거림이 소란하고  유순하지 못한 바람의 숨소리와  귀뚜라미 둥글게 폴짝대는    푸른 몽고반점을 물려준  내 始祖의 이야기가 묻어 있을 것만 같은   천년의 약속이 고여 있는  유목의 따뜻한 방   칸막이 하나 없이도 代를 이으며  3대가 살았다는 명불허전 大家에서   나, 생의 절반을 걷고 걸어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아름다운 숨소리와  유목의 첫날밤, 여한 없이 품었네     -전문(p. 64)  ----------------------* 『미네르바』 2024  여름(94)호 에서* 이채민/ 2004년『미네르바』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