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서철수 노을 서철수 산새 한 마리 하늘에 발자국을 찍고 간 날 동백꽃보다 더 붉은 노을이 피었다 산. 산. 산으로 이어지는 붉은 떨림에 울컥, 눈물이 난다 아! 저 지랄스러운 하늘 꽃밭. 후두둑 후두둑 쏟아지는 꽃잎 사잇길로 깜박거리며 산을 넘는 그리운 얼굴 하나 -전문(p. 61) ----------------------* 『미네르바』 2024 여름(94)호 에서* 서철수/ 1999년『시와비평』으로 등단, 시집『바람이 건네준 말』등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6.23
초여름에/ 장충열 초여름에 장충열 물안개의 여운을 좋아한다는 말의 끌림은 나를 휘저어 닫혔던 기억의 문이 열린다 장미보다 안개꽃을 더 좋아하는 이유다 바림이 느리게 문을 여는 계절의 끝에서 초여름의 정열과 마주하며 태양처럼 달구었던 눈빛이 이끄는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초콜릿처럼 녹아내리던 흔적은 지워질 수 없는 생의 부분이라는 걸 바람결에 듣는다 가끔씩이라도 되돌리고픈 방부제에 절인 언어 잉걸 스위치가 눌리며 물보라로 부서졌다가 살아나는 안갯빛 신비로운 반란 심장을 두드리는 리듬 따라 한 생이 저물어간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허공에 남겨지는 건 진실이고 시간 따라 지워지는 건 어차피 잊어야 할 퇴색한 그림자다 알면서도 통제를 벗어난 이야기들은 푸른 동심원으로 번..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6.23
수박이 웃는다/ 주경림 수박이 웃는다 - 신사임당 「수박과 들쥐」 주경림 잘 익었나 들쥐 두 마리가 땅에 뒹구는 수박을 주둥이로 콕콕 찍어보더니 아래쪽으로부터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한다 껍질이 벗겨지고 빨간 속살이 드러나 단물이 뚝뚝, 냄새를 맡고 호랑나비, 부전나비가 날아온다 들쥐 두 마리는 수박에 열중해 눈길도 주지 않는다 수박 구멍이 입 벌리고 웃는 모양인데 파먹을수록 웃음소리가 커진다 들쥐의 아랫배가 불룩하도록 수박이 제 살점 다 나눠주어 껍질만 남았는데도 우하하하--- 그래서일까 수박을 수복壽福으로 읽는다지 -전문(p. 53) ----------------------* 『미네르바』 2024 여름(94)호 에서* 주경림/ 1992년『자유문학』으로 등단,..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6.23
옛말에 "성공자거(成功者去)"라는 말이 있다/ 이창섭 옛말에 성공자거成功者去라는 말이 있다 이창섭/ 前 동국대 역경원장 * 옛말에 "成功者去"라는 말이 있다. 공이 이룩되면 떠나게 되어 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이것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모든 생명체는 모두가 이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봄은 꽃을 피운 다음에는 떠나고 여름은 잎을 무성하게 한 후에는 떠나고 가을은 열매를 맺은 다음에는 떠나고 겨울은 곧 모든 식물의 죽음의 계절이다. 다음해 봄이 되면 또 다른 꽃이 피고 잎이 자라난다. 동물도 새끼가 자라나면 어미는 죽는다. 이른바 '신진대사'라고 하는 것이 이것인데 이 엄연한 자연의 법칙을 모르고 이름과 명예에 집착해서 천년만년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릴 줄 알고 그 자리에 버티면서 떠날 줄 모르면 이른바 비참한 패배와 최후를 맛보게 되는.. 한 줄 노트 2024.06.22
학술서_『바보의 잠꼬대』/ 이창섭선생가훈(李昌燮先生家訓)전문 이창섭선생가훈李昌燮先生家訓(전문) 이창섭(1926_2000, 74세) 이제 나의 나이도 고희를 넘어 얼마 남지 아니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다음과 같은 몇 가지 말을 자손들에게 남기고 싶다. 1) 청렴하게 살되 인색하지 말아라! 우리 집안은 근세 약 백년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넉넉한 재산을 가진 집안이었다. 그러나 대대로 학문을 업으로 삼은 집안인 까닭에 사치를 엄중히 경계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집안에 수십 명의 노비가 있었던 시절에도 닷새에 한 번은 콩나물죽을 끓여 먹었다고 듣고 있다. 아무리 재산이 넉넉하다 하더라도 사람은 청렴결백하고 음탕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구두쇠가 되어 인색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고 이웃의 불행을 도와주는 일에 결코 인색해서는.. 여러 파트의 글 2024.06.22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3 정숙자 책갈피에 끼울까 하고 낙엽 한 잎 주워듭니다. 낙엽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 아니 아니야 안 돼…’ 그가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지만, ‘알았어’ 조심스레 제자리에 내려놓고는 저 또한, 제 갈 길 표표히 걸어갑니다. (1990. 10. 17.) 3·40년쯤 앞에서 누군가 저의 길을 돕고 있었던 듯합니다 고비 고비마다 3·40년쯤 앞에서 누군가 저의 길을 비춰주고 있었던 듯합니다 어둠의 분광기記라고 해도 될까요? 제가 발표한 모든 시와 산문 그 안쪽에 숨긴 투덜거림까지를, 3·40년쯤 앞에서 놓아준 낙엽과 나비와 잠자리, 여치와 풀무치들이… 그러지 않았을까요? 간절히 저 대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 그룹명/나의 근작시 2024.06.22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3/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3 정숙자 책갈피에 끼울까 하고 낙엽 한 잎 주워듭니다. 낙엽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 아니 아니야 안 돼…’ 그가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지만, ‘알았어’ 조심스레 제자리에 내려놓고는 저 또한, 제 갈 길 표표히 걸어갑니다. (1990. 10. 17.) 3·40년쯤 앞에서 누군가 저의 길을 돕고 있었던 듯합니다 고비 고비마다 3·40년쯤 앞에서 누군가 저의 길을 비춰주고 있었던 듯합니다 어둠의 분광기記라고 해도 될까요? 제가 발표한 모든 시와 산문 그 안쪽에 숨긴 투덜거림까지를, 3·40년쯤 앞에서 놓아준 낙엽과 나비와 잠자리, 여치와 풀무치들이… 그러지 않았을까요? 간절히 저 대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6.22
그 겨울의 매미 울음/ 윤고방 그 겨울의 매미 울음 윤고방 둔중한 바위 문이 스르르 닫힌다 중앙수술실 문지방을 지나며 철 침대 위에서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떠났다 지난여름에도 병원 밖 매미는 극성이었다 순간은 영원의 가면을 쓴 채 지하 세계와 지상 세계 어디쯤 샘물 한 모금으로 떠 있을 텐데 창밖엔 때 이른 첫눈이 내린다 무성한 매미 울음을 차단한 차가운 방음벽 아래 메스는 피의 바다를 건너고 있을 게다 바위 문이 영영 닫히기 전에 대양 가운데 홀로 떠 하늘의 계시를 받고 있는 계절은 그녀의 마지막 미소를 건지기 위해 마지막 절벽을 오르기 위해 삐걱거리는 노를 더 힘껏 저어야 할 텐데 매미들이 한겨울 폭설 울음을 운다 -전문(p. 47) ----------------------* ..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6.22
이창섭 著 『바보의 잠꼬대』/ 주자가훈(朱子家訓)전문 : 이창섭 譯 주자가훈朱子家訓 주희朱熹/ 이창섭 譯 아비로서 귀히 여겨야 할 것은 자애한 마음이며 아들이 귀히 여겨야 할 것은 효도다 임금이 귀히 여길 것은 어진 마음이요 신하가 귀히 여길 것은 충성이다. 형이 귀히 여길 것은 사랑이요 아우가 귀히 여길 것은 공경이다 남편이 귀히 여길 것은 화목이요 아내가 귀히 여길 것은 유순함이다. 스승과 어른을 섬김에는 禮를 귀중히 여기고 벗을 사귐에는 믿음이 귀중하다. 노인을 만나면 공경하고 어린이를 만나면 사랑하라. 덕이 있는 사람은 나이가 비록 나보다 어리더라도 반드시 그를 존경하고 불초한 사람은 나이가 비록 나보다 많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멀리하라 다른 사람의 단점은 삼가 말하지 말고 자기의 장점은 절대로 자랑하지 말라 원수진 사람.. 여러 파트의 글 2024.06.21
꿈속에서 죽었다/ 이성필 꿈속에서 죽었다 이성필 조금씩 모자란 꿈을 꾸었다. 열 개가 필요한데 아홉 개밖에 없었다. 다섯 개가 있어야 하는데 네 개밖에 없었다. 늘 조금씩 부족했고 가진 모든 것을 주었다. 모자라게 주어서 주고나면 죽었다. 줄 때마다 조금씻 부족해서 죽었다. 죽고 다시 태어나면 울었다. 두 개가 필요한데 늘 한 개였다. 죽으면 모자라게 태어났다. 태어나면 부족해서 죽었다. 부족한 전부를 주었고 전부가 모자라서 죽었다. 꿈에서도 슬펐고 깨어나서도 꿈이 슬펐다. -전문(p. 41) ----------------------* 『미네르바』 2024 여름(94)호 에서* 이성필/ 2018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한밤의 넌픽션』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