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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환_기름과 돌봄의 능력, 그리고···(발췌)/ 꽃님이라 부르던 이름 : 정빈

꽃님이라 부르던 이름      정빈    어젯밤 꿈속에서  소복이 쌓인 눈 위에 꽃을 그렸어요   베란다 화분에 맺힌 멍울 하나  밤사이 꽃으로 피어나서  이별의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휘청대는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새벽을 깨우던 바람은  눈물 한 번 닦아주지 않았던 방관자   보이지는 않지만 곁에 있는 듯  들리지는 않지만 귓가를 맴도는   꽃님이라 불리던 이름   오늘도  고백으로 시작하는 아침입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전하지 못한 말, 들리나요   마지막 눈이 녹기 전에 누군가  어젯밤 그 꽃을 보셨다면  꼭 전해 주세요   수취인은 울 엄마예요     -전문-   ▶ 기름과 돌봄의 능력, 그리고 꽃이었던 시절/   고명재, 정빈 시인의 신작시에 붙여서(발췌)_차성환/ 시인 · ..

차성환_기름과 돌봄의 능력, 그리고···(발췌)/ 나 안아줘 스님 : 고명재

나 안아줘 스님      고명재    사진 속에는 완전히 깡마른 스님이 무릎 위에 아이를 앉히고 껴안고 있다 육체가 산산조각 나버린 이다 젊었으나 아팠고 병약했지만 그때 그 목소리는 산보다 파랬다 두 사람 다 정면을 보고 있다 사진 밖까지 한때의 눈빛이 닿는다 아이의 어깨는 어른의 양팔에 가려져 있고 편안한 듯 따스하게 감싸져 있다 어떠한 경우든 어른은 아이보다 체구가 크다 사랑은 그런 규모와 골격을 뜻한다    -전문(p. 230)   ▶ 기름과 돌봄의 능력, 그리고 꽃이었던 시절/   고명재, 정빈 시인의 신작시에 붙여서(발췌)_차성환/ 시인 · 문학평론가  '나'는 "완전히 깡마른 스님이 무릎 위에 아이를 앉히고 껴안고 있"는 "사진" 을 바라본다. 추측컨대 "사진 속"의 "아이"는 시인 자신일 것..

고형진_세상에서 가장 슬픈 속삭임(발췌)/ 속삭임 1 : 오탁번

속삭임 1     오탁번(1943-2023, 80세)    2022년 세밑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옆구리가 아프고  명치가 조여온다  소리를 보듯  한 달 내내 한잔도 못 마시고  그냥 물끄러미 술병을 바라본다  무슨 탈이 나기는 되게 났나 보다  부랴사랴  제천 성지병원 내과에서  위 내시경과 가슴 CT를 찍고  진료를 받았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다  (참신한 비유는 엿 사 먹었다)   췌장, 담낭, 신장, 폐, 십이지장에  혹 같은 게 보인단다  아아, 나는 삽시간에  이 세상 암적 존재가 되는가 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1초쯤 지났을까  나는 마음이 외려 평온해진다  갈 길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가는 것보다야  개울 건너 고개 하나 넘으면  바로 조기, 조기가 딱 끝이라니!..

무난한 관계/ 신명옥

무난한 관계      신명옥    솔직해져도 될까요?  날것은 무모해서 두렵기도 하지요  별빛을 헤아리거나 달무리를 관찰하지 못한 채  편견을 불쑥 쏟아내기도 하니까요   드러내기보다 침묵해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아직 내 그림자의 컨디션과 옆구리의 검정도 모르니까요    오래 말을 묶어두기 잘했어요  질긴 섬유질을 소화시키는 중이에요  거친 말머리를 손질하고 긴 꼬리도 잘라야 하지요    스스로 묻고 답하며 걸어왔어요  나보다 앞서 수많은 고개를 넘어간 당신  시간이 흐른 후 보이네요  내가 넘어야 할 말의 봉우리들   당신에 관해 내 멋대로 발설하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보류하는 게 낫겠어요  걸음이 생각을 기르는 동안  차이를 긍정하는 것으로 소통은 충분하니까요     -전문(p. 71-72)   ..

염선옥_해체의 상상력과 그러데이션의 언어(발췌)/ 실어증 : 강준철

실어증      강준철  사물들이 실어증에 걸렸다.책들은 모두 책장 안에 서서 잠을 자고, 방바닥에 쌓아놓은 잡지들은 허리를 다쳐 일어나지 못한다. 기타와 카세트테이프와 청소기는 식물인간이 되어 누웠다. 여름 이후 목 디스크에 걸린 선풍기가 눈을 흘기고 있고, 종이로 얼굴이 막힌 코로나 마스크들은 몸을 움츠리고 눈치만 살핀다.우리말 사랑을 외치던 가로막 두 개가 몹시 지친 듯 책장에 기대고 서 있다. 문지文知와 창비創批의 그 많은 시집들은 빈틈없이 몸을 붙이고 어깨를 꽉 끼고 있지만 아무 말이 없다. 학위기념패, 상패, 공로패, 감사패들은 상자처럼 쌓여 부끄러운 듯 헌 봉투 밑에 숨어 있고, 상장과 임명장과 표창장들도 장작처럼 포개져 불 탈 날을 기다린다. 피를 뽑아 엮은 논문들과 저작물도 장식품이 되어..

분홍이 익어가는 동안 외 1편/ 김밝은

분홍이 익어가는 동안 외 1편     김밝은    봄이면, 할머니는 진달래꽃을 따다 술을 부어 꽃밭 귀퉁이에 묻어놓고 봄날의 향기로 무르익을 때까지 들여다보곤 했다   개구리울음소리가 마당까지 올라오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잘 익은 분홍을 술잔에 담아 상을 차려놓고는 나쁜 놈 나쁜 놈 질펀한 목소리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런 날은 유난히 반짝이는 밤하늘이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아서 나쁜 놈이 되어버린 아버지 얼굴이 더 궁금했다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건드려주곤 해서 혼자 있을 때면 하늘에 가닿는 비밀을 키우며 두근거리던 날들이 있었다 한 번쯤 꼭 만져보고 싶던 얼굴   세상의 간절함을 모두 모아도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이 있다는 것을 터득해 버린 후 쑥쑥 자라던 상상력은 산산조각이 났고 나도 가끔 고개를 ..

참, 눈물겹기도 하지(+해설)/ 김밝은

참, 눈물겹기도 하지         선유도에서      김밝은    밀어내도 밀어내도 마음만은  무작정 아득해져서   홀로 선 바위도 섬 하나가 되고  떨어진 꽃 한 송이도  한 그루 나무의 마음이 되지   비를 붙들고 걷는 사람을 꼭 껴안은 바다는  열어젖힌 슬픔을 알아챘는지  흠뻑 젖은 그림자로 누워 있네   아무리 생각해도   섬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참, 눈물겹기도 하지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상의 전개를 살펴보면 시인은 "밀어내도 밀어내도 마음만은/ 무작정 아득해져서"라고 말하는데, 마음이 아득해지는 것은 그것이 소멸하거나 무화되지 않고 멀어지면서도 쌓여서 깊어지기 때문이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세계이기에 "홀로 선 바위와 섬 하나"가 부모와 자식과 같은 유정한..

그 겹과 결 사이/ 노혜봉

그 겹과 결 사이      노혜봉    ㅁ이라는 방, 마음가면*의 모서리 각이 있는,  저 깊은 곳 ㅇ방은 또 어디에 갇혀 있나    불안한, 초조한, 두려운, 가끔은 오만한 ㅁ,  섣부른 이 지병은 날마다 널 보며 자꾸 보챈다  한참 모자라다 스스로 뾰족한 각을 키운다   부추를 다듬으며 매운 파를 다지며 넌, 무기력해  걸레를 빨며, 잡지는, 신문은 안 보아도 괜찮아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말자 야단치지 말자   지난달부터 넌, 암, 쬐끔 아팠지, 고까짓 것 괜찮아  불안해하지도 말자 미련을 삭이지도 말고  죽을 만큼 기침이 심한 건, 평생 두려워해서 못한 말  무서운 부끄러움이 게으른 구석 점, 점으로 닫혔다   ㅁ ㅁ ㅁ 널 미워했던 싫어했던 거울 뒷면의  한 끗 욕심, 지루한 편견으로 쌓인 벽,..

전해수_결별(訣別)의 역설(발췌)/ 훗날의 꿈 : 박완호

훗날의 꿈      박완호    지나간 훗날을 더는 꿈꾸지 않으리  한 손가락 굽은 여자의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나지 않으리  그녀의 순한 눈망울을 닮거나 물려받지 않으리  오월 햇살같이 다사로운,  엄마라는 발음의  나보다 어려지는 한 사람을 품지 않으리  슬픔의,  아무 데서나 엇갈리는 걸음을 재촉하거나  꿈꾸지 못하는 밤을 책처럼 쌓아두지 않으리  문밖 살구나무 아래를 서성이는  자국 없는 발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리  제대로 늙어보지도 못한 아버지  깜깜한 물소리 끼고 산등성이로 향하는  마지막 걸음을 그대로 두지 않으리  서러운 꿈의 궤적을 비껴가는  어떤 내일도 돌이키지 않으리        -전문-   ▶결별訣別의 '역사 읽기(발췌)_전해수/ 문학평론가  시 「훗날의 꿈」은 결별 이전을 꿈꿔보..

딱한 처지/ 황상순

딱한 처지      황상순    알록달록 아름다운 물고기  비단잉어 코이는 수족관 모양에 따라  그 크기까지 달라진다고 하는데  작고 보잘것없는 어항에 담겨  가난하게 변한 코이야  너는 어쩌다 내게 코를 꿰이고 말았니  고대광실 삐까뻔쩍한 집에서  금빛 은빛 지느러미 휘저으며  얼마나 반듯하고 화려하게 크고 싶었겠니  깊은 강에 그냥 두었어야 했다  미안하다, 내 시詩야     -전문(p. 43)   ---------------  * 시터 동인 제6집 『시 터』 2021. 10. 22.   펴냄  * 황상순/ 1999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어름치 사랑』『사과벌레의 여행』『농담』『오래된 약속』『비둘기 경제학』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