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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갔으나 지나가는/ 여성민

지나갔으나 지나가는      여성민    스타벅스 이층에 앉아 시를 쓴다 여러 나라 커피를 마시면 시간은 여러 커피나무에서 따는 여러 저녁 같은데 여러 나라 구름에 손을 넣은 적 있다 손등을 지나 손목까지   커다란 시계로 덮고 다닌 적 있다 거즈처럼   구름 낀 한반도라고 말했다가  복도에서 벌을 섰지  지금은 시계를 풀었지만   거즈 자국이 손목에 남아 있다  시계를 푼 손목은 고무나 젤리같이 느껴지기도 해  미운 애인처럼   젤리는 이빨 사이에 끼고 세상은 젤리를 씹는 힘으로 가득하구나 치아 사이에서 젤리를 빼낼 때 손가락이 잠깐 참호에 들어갔던 느낌 엄마 몰래   여러 저녁에 참전한 느낌   언젠가 참호 밖으로 나갈 거야 소총을 맨 채 커피나무라고 우기거나 죽은 병사들의 손에서 시계를 벗기며 엎드..

먹구름의 앵무새/ 박판식

먹구름의 앵무새      박판식    그래봤자 파산 없는 인생이 무엇을 알까요  집도 쓸려가고 과수원도 진흙탕이 되고 농기계도 없어진 텅 빈 마당에  경북 김천 사람이 서 있네요   살아남은 사람은 각자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내가 죽고 싶을 때 죽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자연은 무자비하고 순수한 어린 아이입니다   간선버스를 놓치고 전철을 놓치고 손님을 놓치고  오늘따라 접시도 깨지고 분식점 아주머니는  가게를 접고 석 달은 그냥 신나게 놀겠다고 말합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즐거운 거짓말입니다   혼자 머리를 감고 빵집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고 서류를 몇 장 넘겨보다가  사무원처럼 빈 몸으로 퇴근하는 행복을 맛보고 싶습니다  비가, 나무 없는 나무의 열매들처럼 하늘에서 쏟아집니다  다 담을 수 있을까..

암막/ 윤의섭

암막     윤의섭    네 어둠을 지켜줄게   이런 마음은 눈 내리는 장면을 닮은 것이다  나는 바닥까지 드리운 결심을 걷어내지 않는다   몇 년을 지나 깬 듯한 아침  이사 온 지 한참 됐어도 낯선 거리  버스기시에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식당 주인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나는 나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창가에 앉은 나는 거대한 눈물이었다   네 어둠은 새어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저주를 나는 거둬들일 생각이 없다  내가 막고 있는 건 햇빛 별빛 가로등 빛 무수한 종류의 빛 반대편으로 내몰린  모든 곳으로부터의 끝에 사는 생물   나는 풀려날 때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  두려운 것일까  눈처럼 마침내 사라져 버리는 일은       -전문(p. 91-92)    -----..

눈물 젖은 국어사전/ 허금주

눈물 젖은 국어사전      허금주    나는 누군가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예인 적이 없다    열다섯  소녀가  백일장 장원 선물로 국어사전을 가슴에 안은 날  한평생을 글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 길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고  최소한의 물질적 자유를 허덕여 했던  백 년 전 영국의 버지니아 울프와 숨결을 섞어 본다   생계를 유지할 하루가 충분하다면  국어사전을 품에 안은 채  만리장성 보다 길게 이어진 꿈의 성으로 들어가도  쓸쓸함은 살아  의식을 가진 모든 말들에서 서로 볼을 부비며  순간 불꽃을 일으켜 다음 글쓰기로 이어진다   이사를 몇 번 하고  가끔 타인으로부터 값비싼 보석을 건네받으면서도  끝내 헌책 꾸러미로 팔아 버릴 수 없는   굶주린 배를 가죽혁대로 졸라매며 펼쳐들던     -..

액자, 또는 액자소설/ 이경교

액자, 또는 액자소설      이경교    나는  그를 찾아 떠났지, 보이지 않는 파랑새 가로수 길  따라 날아갔지, 새는 돌아오지 않았지  나는  그였을까, 아니면 새가 날아간 가로수 길 끝에  내가 막 당도한 걸까, 가쁜 숨 몰아쉬며  그가  내 안으로 달려든 걸까, 아니면 내가 그를 간절히  꿈꾸고 있었던 걸까  잠들지 못한 내 잠 속으로 그가 날아들 때까지  별은 허둥지둥 길을 비추고  사각의 창틀 안에 갇혀있는 그를 사각의 창틀  밖을 지나가는 나는 꺼낼 수 없지  그는  결국 빈 자리로 돌아올까, 그가 있는 창틀 안에도  빈자리 하나 남아있겠지, 둥그렇게  말 없는 우물처럼  내가 남겨놓은  젖은 그림자와 함께    -전문(p. 75)   -------------------  * 『시로여는세상..

가불릭신자/ 유안진

가불릭신자     유안진    엿들은 게 아니라 저절로 들렸다 찻집에서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세평世評이어설까  "정치인은 다 가불릭신자"라는 말도   가불릭?  몇 번 중얼거리다가 감탄했다  기독교 불교 가톨릭 모두의 지향은  동일同一하다는 말일 듯  놀라운 통찰 발상 창의력 아닌가 하고  뉴스마다 가불릭신자들부터 시작된다  볼 때마다 감탄한다     -전문(p. 57)  -------------------  * 『시로여는세상』 2024-봄(89호)호 시> 에서  * 유안진/ 1967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달하』『다보탑을 줍다』『터무니』등, 산문집『지란지교를 꿈꾸며』등

내 마음은 오수요/ 이범근

내 마음은 오수요      이범근    한밤중 호수에 던진 돌 다음 날에서야 풍덩, 소리가 났다 아무도 따지 않아 달다 못해 썩은 과일이 떨어지고 호숫가 낚시꾼들이 먹고 버린 육개장 컵라면의 멀건 기름이 표정처럼 뜬다   문득 어두운 사람은 시체에 돌을 묶어 버린다 호수는 그걸 물 밖으로 뱉어낼 수 없고 수면은 그때마다 출렁인다 잔잔하다 호수는 스스로 출렁이는 법을 모른다 건너편 물가엔 신사용 양말만 신은 남녀가 서로를 서로에게 넣었다 뺀다 소스라친 우리에겐 수면이 없다   수심水深에 그런 치욕과 공포와 아름다움을 다 가라앉혀 놓고   호수엔 너른 둘레가 있다 한없이 원에 가까운 물가 피었다 죽는 식물과 벌레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검은 깊이를 두려워하고 신성시하고 호수가 갑자기 말라버릴 재앙에 대해서 말..

어느 양육/ 이영광

어느 양육     이영광    어려선 늙고 병든 죽음들을 키웠다  사라져서 더는 나타나지 않던 얼굴들  먼 역사를 배우듯 관광하듯  무심하고 갸우뚱한 날들이었다  자라선, 사납고 굳센 죽음들을 키웠다  높은 말을 타고 큰 칼을 치켜든 어둠이  꿈속까지 뒤쫓아왔다 절망의 골짜기에서  사로잡히곤 했다 무시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잃고  돌아보면, 죽음 양육 어둠 양육을 잊은  초롱초롱한 세월이 떠올랐다 사실은 그 환한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때 생은 홀연  선잠처럼 아릿하고 또 달콤하게 가물거린다  어둠의 입 속에서 어둠을 찾는 나날이거나  잠깐의 파문과 한량없는 적요, 또는 침묵  그러나 고운 신기루 길을 막는 안개 속에  흘러가는 그때 그 시간은 또 너무 짧아서  ..

밤에/ 심선자

밤에     심선자    밤에 내린 눈을 옥상은 이해한다는 것인가  주저앉아 있다   어디서 가둬 놓은 바람이 한꺼번에 풀려났는지 흰 물감을 뒤집어쓰고 죽을 쒀 놓은 세상   눈동자에 떨어진 눈송이 눈이 얼굴에서 녹는다 다가와서 자세히 보면 흰 살이 죽죽 찢어져 날리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볼수록 폭탄 같은데,   엄마는 떨어진 인형의 눈알을 꿰매고 있다 잠도 자지 않고서, 인형을 다 만들면 엄마, 어디 가지 마세요 우리는 사랑으로 태어났잖아요   푹푹한 솜이불 위 먼지가 폴폴, 우리가 뛰어놀기 좋은 곳, 우리의 꿈은 여기에서 만들어진다   이 광경은 무덤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너무 추웠는데 따뜻하다 말하면 거짓인 것인가  걸레가 얼어붙은 밤이었기에 죽지 말자며 서로의 얼굴에 입김을 불어넣었지   흩어진..

심장 뛰는 인형 외 1편/ 정여운

심장 뛰는 인형 외 1편      정여운    해질녘 그네에서 깨어났죠 저녁돌이 내게 사랑을 넣었나 봐요 가슴께에 빛바랜 얼룩이 선명했죠. 나는 오늘부터 사랑을 하기로 했죠 가끔 모래바람이 불어도 숨바꼭질처럼 꼼짝하지 않았어요 밤이 되면 바다는 동화를 들려주었어요 푸른 요정을 만난 인형은 사람이 된다고요 나는 꿈을 가졌어요 진짜가 되고 싶었어요   누군가 나를 잠깐 들었다가 내려놓았어요 사랑을 가득 받고 싶었어요 거슬리는 실밥을 없애면 너를 좋아할 거야 바람에게 실끝을 주었어요 왼쪽 팔이 풀려서 약간 덜컹거려요 나는 버림받은 걸까요 아무도 없는 백사장에서 수평선을 잡고 매달렸어요 요정을 만나면 정말 사람이 될 수 있나요? 너는 재활용 수거함에 가야 할 거야 진짜가 아니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꼭 진짜가 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