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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상 시(詩)/ 정여운

낙상 詩       정여운    새벽 두 시, 비몽사몽간에   쿵!   하현달이 창틀로 낙상했다   신음처럼 달빛은 책상을 싸안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이다   아픈 구름이 능선에서   엉. 거. 주. 춤. 한다   40킬로미터의 직유가 시작되고 있다   삭정이 같은 불면 속에서   그림자가 화드득 자라난다   내게로 내려앉은 어머니의 뼈 두 마디   비틀려진 詩가 아련히 들려온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롤랑 바르트R. Barthes는 "그의 고통이 내 밖에서 이루어지는 한, 그것은 나를 취소하는 거아 다름없다."(「사랑의 단상」)고 하였다. 바르트는 이 전언이 나오는 장의 제목을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라고 붙였다. 타자의 이름에 대한 공감 혹은 통감은 모든 사상과 예술의 기원이다..

금시아(글), 최영란(그림) 동화집『똥 싼 나무』 「할머니도 부끄러워요?」

할머니도 부끄러워요?     금시아(글) / 최영란(그림)    "향아야, 빨리 학원 가야지."  엄마가 주방에서 큰 소리로 재촉한다.  "네. 갑니다. 할머니도 빨리요"  향아는 할머니 손에 노래 가방을 들려 주고 제 피아노 가방도 얼른 챙겨서 나간다.  발소리 뒤로 현관문이 쾅, 닫힌다.   할머니는 혼자서 농사지을 정도로 건강했었다.  그런데 많이 아파서 지난봄에 향아 집으로 왔다.  할머니는 예전과 다르게 모든 게 느려졌다.  그렇게 말도 행동도 어눌한 할머니가 민요를 배운단다.   "엄마, 민요가 얼마나 어려운데 어떻게 배워요?"  "아냐, 이젠 나도 내가 좋아하는 걸 해 보고 싶구나."  엄마가 말렸지만 할머니는 기어이 동네 복지관 민요반에 등록했다.  그날 밤 향아는 엄마가 아빠랑 나누는 이..

동시 2024.10.03

터널을 지나는 동안/ 서연우

터널을 지나는 동안     서연우    너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스물한 개의 터널을 세고 있었어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구멍을 뚫은  산이 그렇게 깊은 줄 몰랐지  터널을 통과하기 전에는   어떤 터널은 어둑어둑  빛을 몰고 들어가도 어둠이 달려나왔어   나는 숨을 몰아쉬었어  허풍처럼  위험한 거라곤 전혀 없어   너는 입술에 담쟁이넝쿨을 심었어  마스크를 벗기 전에는 다들 몰랐어  고양이처럼 오래 버티려   뼈다귀탕 묵은지를 맛있게 먹었지  더 세 보이는 언니가 됐어  입술걸이에 코걸이까지는 견뎌내라고 했어   귀밑에 있는 사마귀 점 하나 뽑으려는데  한 달 뒤까지 예약이 다 차 있다잖아   터널 속, 심플하게 빠져나간  살과 피는 어디로 갔을까   내 몸은 몇 개의 터널을 뚫을 수 있을까  ..

박잎_수필집 『툰드라백조 깃털을 아세요?』(부분들, 여섯)

언젠가 원주에서 시를 쓰는 노숙인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박잎    * 언젠가 원주에서 시를 쓰는 노숙인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외로웠다는 그의 말을 이해한다고 했을 때 길거리 시인은 말했다. "끝까지 함께 하지 않을 거라면, 책임지지 않을 거라면 함부로 끄떡이지 말라"고. "잘해주지 말라"고. 이 대목에서 자꾸 그 말을 곱씹어 보게 된다. 말리나와 '나'의 대화엔 폭력의 숨은 얼굴이 예리하게 패어져 있다. (p. 21)   * 그는 거리와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단 한 닢의 동전으로 모든 사교를 집중시킨다. 밑 모를 보르헤스의 박학다식함에 손이 떨렸다. 저승길 노잣돈. 시체의 입에서 꺼낸 카론의 은화, 황제가 그를 장님으로 만들어 늘그막에 길거리에서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비잔틴제국 장군, 벨리사..

한 줄 노트 2024.10.02

제발 내버려두렴, 나의 우주를 외 1편/ 금시아

제발 내버려두렴, 나의 우주를 외 1편      금시아    징조도 없이 어느 날 문득,   엉뚱한 목표치에 도달하듯 일상이 급변하면 환경은 재빨리 자신의 경계를 재설정한다지   낯선 일상의 등장은 순식간에 익숙함을 제지하거나 편안함을 격리하고 말지   간섭하지 않으며 침범하지 않는 경계  자연의 거리 두기는,  생성보다 더 먼저 존중되는 규칙이었다지   타자끼리 제 영역을 확장해가면서도 어떤 견고한 고통보다 더 먼저 성장하고, 부피와 질량을 알 수 없는 생소한 슬픔과 외로움, 참을 수 없는 고통마저도 묽게 숙성시켜버리고서는, 비로소 가장 작은 따듯함과 숭고함으로 서로의 눈물 닦아주는   저 자연의 우주는, 고독한 거리 두기에서 출발한 거라지   얼마만큼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얼마만큼 자연스러워야 더 깊이..

머구리 K / 금시아

머구리 K      금시아    바다는 그를 발탁했다   물고기 숨으로 바다를 통역하는 머구리의 본능과 천리안으로 물을 물색하는 사내 K가 바다에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바닷속에 들어가 바다를 제시간에 건져내는 일은 자신을 소생시키는 골든타임,   그러나 K는 바다를 배신하지 않았다   긴 호스로 공급되는 지상의 탯줄을 끊고 물속에서도 물밖을 유유히 들이쉬는 물고기 근육과 아가미를 가진 K는 이미 바다의 생물체,   바다를 가장 오래 걸을 수 있는 그의 몸은 어떤 수압에도 끄떡없어 혹등고래 지느러미처럼 유려하겠다   바다를 박차고 높이 뛰어오른다거나 폭풍우 치는 밤 아무도 몰래 부둣가를 순찰하고 돌아간다면 그도 물 밖이 그립다는 것일 게다   바다를 향해 수저 한 벌 가지런히 올린다   K, 그는 지..

매발톱꽃과 나의 현/ 박잎

매발톱꽃과 나의 현      박잎/ 시인    내 영혼의 비할 길 없는 황량함을 매일 꿈속에서 만난다. 황량함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풀어헤쳐진 잔혹함이라고 해야 할까. 이 잿빛 미망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가슴을 진정시키려 두 눈을 감는다. 막막한 어둠 속, 홀로 가닿는 마지막 풍경은 말이 떨어져 누운 절벽이다. 어디선가 파도 소리 가없이 들려오지만 기이하게 바다가 보이지 않는 절벽. 그 절벽 아래 말이 홀로 누워 있다.   오랜만에 명월리 종점에 갔다. 보랏빛 엉겅퀴에 나비가 하얀 나비가··· 날개에 아주 쬐그마한 노랑 꽃잎을 묻히고 하늘하늘 앉아 있었다. 변두리 빈터. 한낮의 색감은 어쩌자고 이리 아름다운가. 더더욱 절망하며 '명월상회' 앞에 이르니, 개울가에 꽃이 있었다.   옅은 자줏빛 매발톱꽃..

에세이 한 편 2024.10.01

칼잠/ 조행래

칼잠     조행래    눈알을 안으로 풀어내며 꿈을 꾸지 않기로 다짐 이를 갈며 이 대신 잇몸으로 곱씹어 보아도 돌아누워도 말짱 도로 너비 없는 모로 돌아가 아무도 모르게 벼리고 누워 그것이   온다 더듬이를 가지고 혀도 또 모자라서 지팡이를 짚고 쉬지 않고 아주 느리게 달이 뜰 때 발목을 떠나 놓고 달이 지고 있는데도 아직 무릎 위 지치지 않고 두드리며 명치에 두드러기 발자국을 남길 때   목덜미에 가시 돋친 소름이 이불을 끌어 올리고 서늘해지는 발목 초조해지는 발목 둘이 딱 붙어 주거니 받거니 혼잣말과 혼잣말이 누운 날 위에 올라 쩍 갈라지더니 쏟아지는 졸음이   귓바퀴로 흘러 소용돌이치고 고막을 쓰다듬고 막을 내려야 하나 뒤척이는데 날 위에 녹아 내리고 날이 새고 갈고 또 갈던 어금니 부스러기가 ..

툰드라백조 깃털을 아세요?/ 박잎

툰드라백조 깃털을 아세요?      박잎/ 시인    어슬렁어슬렁 흰 고무신을 신고 낭인浪人처럼 풍물장을 거닐던 내가, 좌판을 펼친 날의 기분을 뭐라 말해야 할까.  윈추리며 완두콩이며 머우며 고구마줄거리를 늘어놓고 온종일 장바닥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 틈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젊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희끗희끗 늘어나는 흰머리를 보며 어쭙잖은 신세 한탄을 늘어놓던 나. 몸빼바지에 허술한 잠바를 입은 옆 할머니의 벗겨진 양철 도시락을 보고 있자니 콧등이 찡했다. 낡은 도시락 뚜껑엔 다람쥐가 그려져 있었다.  고도다 방드르디다 쿳시다 내가 꿈을 쫓는 동안, 그녀의 하루는 저렇게 저물었겠지··· 빛나는 여름 햇살 아래서 자신을 불태웠겠지··· 자식들을 키웠겠지.  나는 준비해 온 비누를 조심스럽게 늘어놓았..

에세이 한 편 2024.10.01

카를로 로벨리『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감수의 글」/ 이중원

과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광활한 물리학 여정     이중원/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20세기의 저명한 양자 물리학자인 머리 겔만Murray Gell-Mann은 이렇게 말했다.  "양자역학은 우리 가운데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용할 줄은 아는 무척 신비롭고 당혹스러운 학문이다."  리처드 파인만도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양자 이론은 매우 유용하지만 세계의 실재, 세계상에 대해서 말해주는 바는 이해하기 어렵고 매우 혼란스럽다는 말이다. 오늘날 양자 이론이 물리학·화학·생물학·천문학 등 현대 과학의 기초이고 컴퓨터, 레이저, 원자력과 같은 현대 기술의 유용한 토대임을 생각한다면, 이는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p. 238)  카를로 로벨리는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