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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속의 집 외 1편/ 이미숙

집 속의 집 외 1편      이미숙    나나니벌 일가  안방 바깥쪽 발코니에 흙집 한 채 지었다  계약서 한 장 주고받은 적 없는데  아예 살림을 차린 모양새다   월세라도 지불하듯 창틀에 꼬깃꼬깃  때 묻은 단풍잎 지폐 몇 장   앞뒤 없이 망치부터 들어보지만  빠듯이 몸 들고 날 문 두 짝  마치 깊고 검은 눈 같아서  그 눈빛 비루하지 않고  너무도 당당해서 순간   삼 층 높이까지 진흙을 물고 와  이토록 단단한 집을 지은 것이나  어찌어찌 우리 식구들  이 집 장만하여 모여 살기까지  가상한 노력들이 교차해 떠오르는 것이다   슬그머니 망치 든 손을 내린다  세력이 미미해 보이는 바다  갓난아이 주먹만 한 작은 집이라  내 침실 침범해 들여다보고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야   창 하나 사이에 ..

파랑을 얻는 법/ 이미숙

파랑을 얻는 법      이미숙    인디고풀 베어  꼬박 하루를 물에 담가 두었다가  무람없는 발길질로  파랑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   세 살 아이도  등 굽은 노인도  물속에 종아리를 담근다   커다란 구리 솥에서  깨어나 끓고 있는 것은  물속 가라앉은 하늘과  모르포나비 뗴의 날갯짓   맞춤한 틀에 나누어 붓고  기다리다 마음 굳히면  마침내 파랑이다   누구나 침울해질 때 있어  골똘히 하나의 색을 바라보면  욕망의 잎사귀도 함께 일렁여   블루데님 블루보틀커피 성모리아의 길고 낙낙한 겉옷 이브 클라인의 그림 한 점 파라오의 머리카락   어지러워라,  너는 무엇을 걷어차서  파랑을 얻는가     -전문-   해설> 한 문장: 현대 사회의 복잡다단한 시스템은 기의 없는 기표들의 무한한 증식에 따른..

폭력, 애도, 정치(부분)/ 김춘식

폭력, 애도, 정치(부분)     김춘식/ 문학평론가    애도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내적 의미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칸트적 윤리의 명제를 실천하는 일이고 그래서 누구도 이 책임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다. 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이 21세기적인 비전을 획득하는 과정에는 사실 이러한 거대 주체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거대 주체의 지배 아래에 있는 개인은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자유가 없는 주체는 동시에 그 자유의 행사를 통한 윤리적 책임도 질 수가 없는 것이다. 기억과 신체에 대한 억압이 해방된다는 측면에서 90년대 이후의 민주화는 새로운 공동체와 정치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의 ..

한 줄 노트 2024.10.09

이미지의 유희 대신 자기 성찰의 자세를/ 김병호

이미지의 유희 대신 자기 성찰의 자세를      김병호    아쉽게도 이번 2024년 전반기 신인상 공모에서는 신인을 배출하지 못했다.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남으면서 또 다른 기대를 가져 볼 만한 기회였다. 낯익은 이름이 몇 보였으나 이전보다 나아졌다고 볼 수 없는 수준에 그쳤고, 새로운 이름들은 절대적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풍성해졌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시를 쓰는 이들이 있는 사실에 '다음에'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평론가 김현은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합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시가 자꾸만 읊조림이 되어가고 있다. 역사와 사회, 자기..

한 줄 노트 2024.10.09

아내/ 정여운

아내      정여운    열두 자이던 장롱이 여덟 자로 갈걍갈걍해졌다   이사할 때마다 벽에 부딪히고  모서리에 찍히고 긁혔다   장마철 물난리에 퉁퉁 불은 그대여  내려앉은 서랍조차 팡파짐하구나   처음 봤을 때는   뺨에 피는 부끄럼처럼 연연했다  그러나 아양스러운 날들은 계속되지 못했다  갈수록 오종종한 몸과 걸걸한 문짝 같은 목소리가  내게 왁실거렸다   몇 번의 곡절에도 꿋꿋하게 버텨온 그대여  마음을 담았던 옷장 한 칸이 부서졌구나   윗목을 그토록 지켜온 몸이 반쪽이다   남들은 버리라지만 버리지 못한다  버리지 못해서 버리지 못할 정이 들었다   구석구석 삭아진 아내여    -전문(p. 64-65)   --------------  * 詩에세이집 『다알리아 에스프리』에서/ 2024. 6. ..

에세이 한 편 2024.10.08

다산은 18년이라는 긴 유배 기간에 불굴의 정신으로/ 정여운

다산은 18년이라는 긴 유배 기간에 불굴의 정신으로       정여운   * 신유박해로 1801년 3월 9일에 장기(포항 ※참고)에 유배 온 다산은 그해 10월 20일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좌절과 절망이 아닌, 투지로 시와 책을 지었다. 유배생활 중에 그는 「기성잡시 27수」,「장기농가 10장」,「고시古詩 27수」 등 60제題 130여 수의 시를 지었다.  효종이 죽은 해의 효종의 복상 문제로 일어난 서인과 남인의 예론禮論 시비를 가린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辯, 한자 발달사에 관한 저술인 「삼창 고훈」, 한자 자전류인 「이아술爾雅述」 6권, 불쌍한 농어민의 질병치료에 도움을 주는 「촌병혹치村病惑治」등의 저술도 후대에 남겼다.  다산은 18년이라는 긴 유배 기간에 불굴의 정신으로 실사구시의 학문을 집대성하고, 사..

한 줄 노트 2024.10.08

이자이(李滋伊)/ 정여운

이자이李滋伊     정여운    육십사 년 동안 이름이 없던 어머니  열일곱에 시집가서 얻은 이름은  연산댁이었다   첫째를 낳고 상진이 엄마  둘째를 낳고 승표 엄마  셋째를 낳고 광표 엄마  넷째를 낳고 임숙이 엄마  다섯째를 낳고 정표 엄마   팔순 노인이 되자  드디어 요양원에서 찾게 된 이름  오얏 이李, 불을 자慈, 저 이伊,  이자이   영정에 새겨진  화장터 전광판에 올라온  묘비에 새겨진 이름  이자이李滋伊   어머니는 어머니를 버리기 위해서  평생을 사신 것이다    -전문-   발문> 한 문장: 시詩에세이집 『다알리아 에스프리』는 에세이와 시가 번갈아 나온다. 작가는 수필로 문단에 발을 들였으나 시의 매력에 빠지면서 세상이 온통 시로 보였다고 고백한다. 작가가 에세이에서 토로하는 내면..

에세이 한 편 2024.10.08

다알리아 에스프리/ 정여운

다알리아* 에스프리      정여운     지난 여름, 장마는 길었다. 녹슨 철 대문이 비바람에 저절로 여닫혔다. 그녀는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긴 장마에 마당은 잡초가 무성했다. 허리까지 오는 풀들이 바람에 서걱대고 있었다. 집은 여느 때와는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 일주일 만에 찾아온 집이 폐가처럼, 유령의 집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잡초를 옆으로 뉘며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 앞에 섰다.  "엄마, 저 왔어요."  인기척이 없었다. 여느 날 같으면 문을 열고 "그래, 우리 딸 오나?" 하며 반색할 텐데 조용했다. 매일 화분을 만지고 화단에서 꽃을 키우고 집을 가꾸던 노모는 어디로 갔을까. 폭우에 쓰러진 꽃처럼 몸져누우셨나.  일주일 전, 그녀의 아버지가 갑자기 피똥을 쌌다. 방안은 꽃동산이 펼쳐..

에세이 한 편 2024.10.08

시인의 데이트 외 1편/ 김선영

시인의 데이트 외 1편      김선영    50년대 가을날 공덕동 301번지, 미당 선생 댁을  우리들이 방문했을 때 그분은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노란 국화향기에 젖어 계셨다.  글 쓰시는 방 벽체엔 액자도 없이  천경자 화백의 화사도가 한 점 수수하게 붙어 있었다.  벽지 속 무늬처럼 오색 물감의 꽃뱀들이 수풀 속에 엉켜  벼랑의 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 쓸 때  무리 중 하나가 물감을 벽에 묻히며 기어 내려와  선생의 책갈피 사이로 스며들었다.  마당의 노란 국화밭에는 하늘에서 삽으로 퍼내리는 진한 금햇살로 광채를  이루고 있었고,  '찬란하구먼'  가난한 시인은 부러진 안경테 대용으로 삼은 무명실의 귀걸개를 연신 치켜  올리며 국화의 아름다움도 함께 치켜올리셨다.  나는 시인과 국화와의 ..

타는 저녁놀/ 김선영

타는 저녁놀     김선영    타는 노을 속으로  지나가는 새처럼  들어갔다  나왔다  나는 검게 탄  숯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때다  마악  하늘이 손을 내밀어  불가마에서 꺼낸  화상 하나도 없는  흰 살의 백자 항아리  고이 서편으로 모셔가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서쪽 하늘의 타는 듯한 저녁놀에서 시인은 항아리를 굽는 가마를 상상한다. 타는 노을 속으로 새가 지나가듯이 시인도 그 가마를 드나들다 숯처럼 정화되었다. 이 정도의 상상은 노을을 보면서 한 번쯤 할 만하다. 이때 시인의 상상력은 한 번 비약하여 그 가마에서 하늘이 손을 내밀어 백 항아리를 꺼내는 장면을 본다. 저물녘에 보이는 낮달일 것이다. 시는 이로써 짧으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완결되었다. 군더더기 없는 언어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