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3373

Ⅲ 현묘지도 즉 풍류도/ 고영섭

Ⅲ 현묘지도 즉 풍류도        「고운 최치원의 풍류 이해와 삼교 인식」 中     고영섭/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최치원은 신라 경문왕 8년(868)에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아버지로부터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가서 힘써 공부하라"는 말을 들었다.최치원은 '남이 백 번하면 나는 천 번을 하여'人百己千9)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결과 그는 선주宣州 율수현위凓水縣慰가 되고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때마침 최치원은 황소黃巢의 반란(875~884)이 일어나자 병마도통兵馬都統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25살 되던 881년(唐 廣明2, 辛丑) 7월..

마스크 1학년/ 김양아

마스크 1학년     김양아    1학년 한율이가 일주일에 두 번 학교 가는 날  엄마와 둘이 집에 남아 심심했던 서율이  오빠가 돌아오면 달려가 반갑게 맞아줍니다  게임도 하고 간식도 먹으면서 같이 놀아요   한율이가 제일 좋아하는 축구교실 가는 목요일  등에 이름이 쓰여진 노란 유니폼을 입었어요  서율이도 따라간다고 현관 앞에 서 있네요   아이들은 공을 몰아 훌라후프 안에 넣기도 하고  팀을 나눠 인조잔디에서 경기도 합니다  따라온 가족들은 그물벽이 쳐진 곳에서 구경해요  "오빠, 힘내라~" 서율인 응원도 해줍니다  가방을 뒤져 물도 마시고 해바라기 초코씨앗도 꺼내 먹어요  엄마는 얼른 다시 마스크를 씌워줍니다  언니 오빠들도 마스크 쓴 채 땀 흘리며 운동을 해요   오랜만에 밖에 나와 걸어오는 길..

새와 유리벽 외 1편/ 김양아

새와 유리벽 외 1편      김양아    가을비 내리는 오후  카페 유리문 곁에 종이비행기처럼  작은 새 한 마리 떨어져 있다   건물 통유리 창에 가로 세로로  쭉 찍혀 있는 하얀 점 혹은 무늬의  그 멈춤 신호를 놓쳐버린 그들의 깃털들  수많은 방음벽이나 커다란 유리창 아래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경계 없는 그들의 길을 가로막는 건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벽   어쩌면 비를 피해 날아가던  이 한 줌 온기도 투명한 유리벽이  시간의 끝이었다   채 접히지 못한 날개  하염없이 젖는 채로     -전문(p. 51)      ------------------------     창문하다    포르투갈에는   창문하다janelar라는 단어가 있다  그래서일까 페소아의 『불안의 서』에는  창문턱에서 따로..

간격/ 김양아

간격     김양아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데  우산 들고 서둘러 가도 이미  너는 자박자박 빗속을 걸어갔을 텐데   제때 닿지 못하는 시간과 거리가 있다  어찌할 수 없어 다만 안절부절못하는  고스란히 마음 젖는 것 외엔 달리 방법 없는   뭐든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 마음뿐인,  해줄 수 없음으로 자주 절망한다   네게로 향한 징검다리를 건너며  수시로 미끄러지는 나는  늘 시리게 발을 적신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짧은 시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많은 말을 절제하고, 객관화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살다보면 이 세상엔 "제때 닿지 못하는 시간과 거리가 있"어 "뭐든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 마음뿐인,/ 해줄 수 없음으로 자주 절망"하는 순간순간을 맞게 ..

이 하루 외 1편/ 운경 김행숙

이 하루 외 1편     운경 김행숙    밤에도   태양은  잠들지 못하고   깨어나  서성인다   넓고  넓은 하늘   환하게  지는 해   커텐을 내린다   남아 있는  사람들   시간을   태양을 지운다   -전문(p. 142-144)    ---------------   놀이터    빈 시소  기울어져 있다    바람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제 무게를 놓아버린  저녁   목련 나무  그림자   시소에 올라탄다   지상의  왼쪽은  끝없는 바다   오른쪽은  석양을 흔드는  정원   현기증으로 충만한  한 점 허공  그림으로 걸려 있다   숲을 흔드는   보지 못한  꽃   -전문(p. 42-43)  -------------------------- * 한영 대역 시집 『신의 부스러기』 2024..

거울/ 운경 김행숙

거울     운경 김행숙    자화상   흙으로 만든   신의  부스러기    -전문- 해설> 한 문장: 한국시는 한반도의 초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풍부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시의 초기 사례는 향가와 같은 시적 형식이 발달한 삼국 시대(기원전 37~기원후 668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토속적인 노래는 종교적, 철학적 주제를 다루며 한국어에 맞게 한문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고려 시대(918~1392)에는 고려 가요와 시조와 같은 새로운 시적 형식이 도입되면서 한국 시는 계속 발전해 나갔습니다. 특히 시조는 특정한 음절 패턴을 가진 세 줄로 구성된 매우 인기 있는 시적 형식이 되었습니다. 이 시적 형식은 개인적인 감정과 철학적 성찰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조선 시대(139..

부케 외 2편/ 허윤정

부케 외 2편      허윤정    던져지는  박수 소리   꽃이다  이 하루   갈채다 특집방송이다    -전문(p. 160)      -----------    폐가    햇살이 머무는 집   그림자의 흔적   바람의 전시관     -전문(p. 112)       ---------------    소나기    타자기  소리   잠들지 못하는  작곡가   -전문(p. 168)   해설> 한 문장: 은유가 관습화되고 고착화되면 죽은 은유가 된다. 죽은 은유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고착화된 인식틀에 가둔다. 그래서 좋은 은유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범주화를 실현한 은유다. 범주화 과정에서 축소되고 은폐된 의미들을 불러내는 것이다. 시인은 고착화된 은유로 범주화된 낡은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은유의 후면으로 축..

가을/ 허윤정

가을     허윤정    낙엽  불꺼진 창   벌레 소리  창문에 불을 켠다     -전문-  해설> 한 문장: 허윤정 시인은 세계의 풍경을 매우 간명한 이미지로 제시한다. 그의 시는 세계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의 조각들을 세밀하게 펼쳐놓지 않는다. 세계의 이미지를 단순하고 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그 이미지가 독자에게 손쉽게 스며들도록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언어의 경제성을 극단화시킨 시 텍스트는 사유나 이미지에서 참신성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시는 가을 이미지를 참신하게 드러낸다. "낙엽"이 지고 "불꺼진 창"이라는 쇠락과 어둠의 이미지 속에서 "벌레 소리"가 "창문에 불을 켜"는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다. 일상적인 어법이라면 "벌레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창문에 불을 켠다"로 서술되겠으나 이런 경우..

구름도 무게가 있다(부분)/ 임종욱

구름도 무게가 있다(부분)    임종욱/ 소설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각양각색의 구름이 떠다니는 걸 볼 수 있다. 뭉게구름, 새털구름, 양떼구름, 삿갓구름, 이름도 참 재미있다. 구름은 하늘을 떠다니니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즉 질량이 없다는 말이다. 그럼 정말 구름은 무게가 없는 것일까? 구름은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있는 것이니    그러니 비를 내리지    당연히 무게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유튜브를 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학드림'이라는 이름의 채널이었는데, 거기에 따르면 적운형積雲形 구름은 대개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킬로미터쯤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부피 안에는 물경 약 500톤의 물방울이 모여 있다고 했다. 이는 A300 같은 점보여객기 1대, 아프리카 ..

한 줄 노트 2024.10.15

조성환_「김지하의 초기사상」 中/ 밥이 하늘입니다 : 김지하

밥이 하늘입니다     김지하(1941-2022, 81세)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갈라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17)     -전문-   ▶김지하의 초기사상/   '신과 혁명의 통일'을 중심으로(발췌)_조성환/ 원광대학교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여기에서 김지하는 밥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밥은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밥을 먹는 것은 하늘을 영접하는 것(몸속에 모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밥은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은 동학 도인들인 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