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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의 노래/ 지연희

햇살의 노래     지연희/ 시인 · 수필가    땅속 깊은 어둠 속에는 생명의 씨앗들이 흙에 묻혀 움츠린 몸을 조금씩 가다듬어 대지를 뚫고 빛의 세상에 솟아오르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지난한 용기와 결단을 세워보지만 가느다란 숨쉬기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 철옹성 같은 단단한 마른땅을 딛고 오르는 결사의 힘을 키우기 위해 생명의 씨앗들은 손톱 끝으로 땅을 파고 어둠의 늪에서 탈출하려 한다. 내 몸 안 깊이 존귀한 생명을 부여해 준 어버이가 걸었던 기억의 흔적을 더듬어 헤쳐나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햇살의 살결이 곱다. 따사롭고 온유하다. 아니 눈부시기까지 한 햇살 한 모금 마시기 위해 슬그머니 눈을 떠 본다. 가슴에 향기로운 꽃향기가 스며드는 느낌이다. 손끝에 닿는 햇살의 온도가 ..

에세이 한 편 2024.09.26

나리꽃 필 무렵/ 남길순

나리꽃 필 무렵      남길순    풀이 미쳤다   황소도 아니고  수탉도 아닌  풀이 미치다니   마당 잔디에 뱀이 숨어들어  긴 삽을 들고 엄마가 서성인다  나도 무르게 달려가다가 돌부리에 채어  엎어진다   저게 사내지 계집애냐고,   뱀 꼬리를 잡고  풀밭에 내리치는 무당의 손을 본다   어른들은 모이기만 하면 독한 담배를 피운다  여기저기 미쳐 자빠진 풀이  쓰러져 일어서려 하지 않는다   살이 오른 수탉은  버찌를 주워 먹은 듯 부리와 혀가 까맣다   때죽을 따 던지며 놀다  삼드렁하게 돌로 찧는다   물고기가 하얗게 배를 뒤집으며 떠오른다   나만 모르는 소문이  숲 군데군데  고개를 쳐들고 피어올라 있다    -전문(p. 12-13)  ---------------------  * 사화집 ..

이태준 문학의 산실, 성북동 수연산방/ 남명희(소설가)

이태준 문학의 산실, 성북동 수연산방      남명희/ 소설가    한양도성 북쪽 마을 성북구 성북동은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에는 시객詩客들이 와서 풍류를 즐겼고, 근대에는 많은 문인들이 모여 살며 창작활동을 펼친 곳이다.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옛집 등에는 아직 그들의 삶과 교류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33년 성북동에 집을 마련한 이태준은 당호를 '壽硯山房'이라 짓고 김기림 · 이효석 · 박태원 등과 를 결성하여 이곳에서 시와 문학을 논했다.  아름다운 문장의 대가이며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렸던 이태준(1904~?)은 강원도 철원 태생으로 「달밤」, 「돌다리」, 「황진이」등 많은 주옥 같은 작품을 남겼으며, 수필집 『무서록』의 작가다. 1940년 간행한 『문장강화』는 지금도 글쓰기 실용서로..

오형엽_모티프, 구조화 원리···/ 흉凶으로 지울 수 있는···비트 1 : 신동옥

흉凶으로 지울 수 있는 모든 것  비트 1      신동옥    여자 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  털이 무성한 목덜미를 가진 사냥감을 쫓는 강아지  엄마가 손 갈퀴로 파낸 들판을 말없이 질주하던 물소 떼  야전침상 아래서 아빠의 작전 수첩을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  언덕 너머 바다에서 나온 말 없는 물고기  어딘가로 끝없이 뻗은 오솔길이 숨긴 깊고 아득한 참호들   숲에서 깃을 치며 나오는 발 없는 새떼······   한때 우리는 같은 상처의 다른 흉터를 응시했다.  출구가 없는 터널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주저앉고는  빠져나올 길을 영영 잃어버려서  거기다 집을 짓고 산다, 파국이라는 비밀 아지트 속에서  접선할 방법을 영영 잊어버려서   흉터는 신비한 담장이 되어 비트를 구획했다.  우리는 꼭꼭 숨어서 침묵..

유배지에서 추사를 지켜준 꽃/ 강은희(생태작가)

유배지에서 추사를 지켜준 꽃     - 제주수선화> 수선화과    강은희/ 생태작가      "수선화는 과연 천하의 큰 볼거리입니다. 강절江浙 이남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마을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없는 곳이 없는데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송이가 많게는 십수화十數花, 팔구악八九萼, 오륙악五六萼에 이르되 모두 그렇게 핍니다. 꽃은 정월 그믐, 2월 초에 피기 시작해 3월이 되면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또는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합니다."  추사의 이 꽃편지가 아니었다면 수선화꽃으로 눈부신 제주 바닷가의 옛 풍광을 상상해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8년 3개월의 깊고 두려운 고독 속에 서 있던 그는 수선화꽃 더미로 들이치는 바람과 ..

근처 새-곤줄박이/ 유종인 

근처 새-곤줄박이      유종인  근처까지만 내려온다밤새 눈물범벅을 만든 사내를 만나러비구니가비구니를 버리려고 겨울 산길을 내려오다가산바람 소리를 듣는다사내가 기다리고 있는 읍내 다방으로 가려다허옇게 잎끝이 마른 산죽山竹 덤불에 웅크린 고라니의 말간 눈빛과 마주친다발목이 부러져 인가에도 기웃거리지 못하고인중이 갈라진 코를 벌름거리며 우는 고라니 때문에비구니는 코앞에 닥친 간이 정류장을 연신 바라만 본다이만하면 됐지, 이만하면 됐어마음에 솟는 붉은 정념을 짙은 회색의 승복으로 가린 그대여 사내는 공연히 차를 식히며 식어가는 차의 일생을 내려다보며자신에게 오고 있을 머리 깎은 애인의 발걸음을 센다  햇살이 비낀 다방 유리창에 날아가는 새 그림자 기척에머리 깎은 애인의 발걸음을 놓치고 얼마쯤 다시 센다이만하..

돌 앞으로/ 정영효

돌 앞으로      정영효    더 많은 땅을 갖고 싶어서 나는 돌밭을 가꾸었다   버려진 땅으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돌을 가려내고 계속 돌을 치우면서   돌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 드러나도 새로움이 없는 것, 한쪽에 버려두면 그냥 무더기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높게 쌓인 돌 앞에서 이웃들은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부르기 쉬운 이름을 붙여주며 하나의 장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전보다 많은 땅을 가지게 되었고 더 이상 가려낼 돌을 찾지 못했다 쌓인 돌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으므로   땅이 줄 내일을 상상했다 작물을 심고 빛이 내리쬐는 계절을 기다리는 동안   이웃들은 여전히 돌 앞으로 모였는데 땅에서는 무엇도 자라지 않았는데 지금을 밀어내는 소식처럼   하나의 장소가 필요..

김정현_순수한 분노의 잔여적 미래(발췌)/ 신의 미래▼ : 최백규

신의 미래▼      최백규    이제 네가 신이 되었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닥에 눕혀진 나를 내려다보며 전해주었다   나무로 되어 조용히 망가진 교실에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서럽게 울면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죽으면 다 끝이라고 반복했다   열린 창을 통해 온몸에 빛이 쏟아지고 손바닥으로 눈가를 쓸어내리듯 바람이 가벼웠다   신은 왜 나에게 신을 주었을까   바다에서 썩지 못하고 다시 밀려온 소년을 바닷가에서 수습하듯이   여름 내내 살의와 선한 마음들이 세계를 둘러싸고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긴 싸움이 이어졌던 것이다   나의 몸 위로 수많은 꽃이 쌓이고   환하게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었다  미래를 마주하고 온 것처럼  살가운 눈물로   더 이상 막아야 할 슬픔..

종일/ 권민경

종일     권민경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에 대해  생각하다 멈췄다   너는 지물포 집 사내아이  2학년 4반  맨 앞에 앉아 있고  피부가 검다   너를 더듬고  빚어보다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는  날씨들이 흘러간다 흘러   둑을 터뜨리고 마을을 집어삼킨다  똥물에서 헤엄쳐 피난 가거나  옥상에서 수건을 흔들 때  우리는 수재민이라 불린다   그거 어쩐지 사람 이름 같아  킬킬거리다 하늘이 밝아온다  뉴스 속보는 흘러가는데   영원히 아홉 살에 멈춰 있는   너의 죽음을 검색하면  고양군이 나온다  고양군은 고양군으로 멈춰져 있다  고양시가 나타나도 소용없는 일   야산은 어느 산의 이름일까  동명이인은 왜 이렇게 많을까  수재민의 아이들도  수재민  아이들이 구호품으로..

김미영_인터넷 시단의 새로운 주체···(발췌)/ 깊은 밤의 시골 국도 : 장이랑

깊은 밤의 시골 국도午夜的鄕村公路      장이랑江一郞     김미영/ 復旦大學校 연구원   깊은 밤, 시골 국도는 이상스레 적막하다  달빛이 어두운 모래알 위를 구른다  어쩌다가 야간 화물차 한 대가  소리 없이 스쳐가  속도에 놀란 반딧불이는  별똥별처럼, 더 깊은 밤으로 빠져든다  이때, 어떤 이가 고향으로 돌아온다, 시골 국도를 따라  새벽까지 고요히 걸어낸다  잠들지 않은 한 마을은, 멀리 떠나는 이를 눈으로 배웅한다  물처럼 찬 밤을 빌려  불 꺼진 저 먼 곳으로 향해 걷는다     -전문-   ▶메인터넷 시단의 새로운 주체, 저층 시인_2. 지식인의 풀뿌리 시(발췌) _김영미/ 復旦大學校 연구원   장이랑의 「깊은 밤의 시골 도로」를 보면, 시의 톤이 상당히 절제돼 있다. 격앙되거나 울부짖지..

외국시 2024.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