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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계단 외 1편/ 정종숙

푸른 계단 외 1편      정종숙    새로 지은 집은 콘크리트 냄새가 났다   담벼락에 주춧돌 놓은 사람 이름이 박혀 있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하늘을 안고 있다   구두 발자국 소리 나는 콘크리트 계단   너라는 집을 지어 본 사람은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오래 서성였던 시간을 기억하는 계단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마주한다   그때 무엇 때문에 멈칫했는지  계단은 끝내 말하지 않는다   발소리만으로 대화는 이어지고  끊어지기도 한다   멀리 오는 너를 보기 위해서  유리벽으로 지은 집   갚아야 할 무엇이 남아 있어서  힘내서 계단을 오르면   모르는 새가 날아가고 있었다      -전문(p. 32-33)     ----------------------   춥게 걸었다    숱한 표정이..

사랑하게 되는 일/ 정종숙

사랑하게 되는 일      정종숙    동쪽으로 십 킬로쯤 달려와  살게 된 동네를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듯이 그렇게   목화솜 같은 눈송이가  나뭇가지에 쌓이는 걸 보면서 이삿짐을 풀었다  막막한 걸음도  받아주는 사람이 있고 녹여주는 곳이 있어  세상은 얼어죽지 않았다   넓은 인도에는 띄엄띄엄 벚나무가 있고  가게 앞에는 옷을 입은 강아지가 있다  턱을 괴고 있는 여인의 조각상이 있는  빨간 벽돌집 마당을  담장 너머로 훔쳐보는 기쁨이 있고  고흐의 그림 밤의 카페테라스처럼  여름밤 치킨집 앞에는  삼삼오오 맥주 마시며 떠드는 사람들  정겨운 소란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은행나무 아래 둥지 튼  공중전화 박스에 풀풀 눈이 들이치면  괜히 전화 걸고 싶은 그리움이 있다  오래된 집에..

불교는 업설에 근거한 인과설을···/ 고영섭

불교는 업설에 근거한 인과설을···      고영섭    불교는 업설에 근거한 인과설을 철학의 근간으로 삼는다. 업설은 행위의 주체인 업을 세계 변화의 원동력으로 보는 관점이다. 업설은 행위의 주체인 업을 세계 변화의 원동력으로 보는 관점이다. 좋은 종자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좋은 행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인과설은 단선적인 인과설과 상호적인 인과설이 있다. 이 때문에 인과설에 기초한 업설은 쌍무적이고 수평적일 때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유교의 효제충신이 한대 이후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효충 개념으로 좁혀진 것과 달리 불교는 처음부터 쌍무적이고 수평적긴 인과설을 제시했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면 부모도 자식을 돌봐야 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는 유교적 관점과 달리 불교적 관..

한 줄 노트 2024.10.23

저글링Juggling처럼/ 박재화

저글링Juggling처럼      박재화    안절부절못하는 소년을 바라보며, 고창증* 걸린 황소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하다   가발 쓴 아이에게 자전거타기 가르치는 젊은 아버지, 안간힘으로 햇살 감기는 뒷바퀴를 잡아당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누가 입대라도 하는지 가로등이 골목을 그러안고 끔벅거린다   저 함박꽃 언제 화엄세계를 이루었나 엊그제도 가지 끝에 찬바람만 비틀댔는데   시드볼트***에선 언젠가인지 모를 언젠가를 기다리며 거처 잃은 씨앗들이 가면假眠의 밤을 보내고 있다   죽음이 일상이고 삶은 비정상이라고 TV에서 안경을 손에 쥔 법의학자가 일갈하는 밤   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 한 몸 안길 수 있는 곳이라면 그 깊은 속으로 무장무장 걸어 들어가는 거다 새벽이 새떼를 ..

시(詩)후기/ 김경수

詩후기     김경수    어설픈 꽃이며 싱거운 눈물이며 뜨뜻미지근 사랑이었던   나의 시를 땅속에 묻어버릴까도 했다  그날은 비가 내렸고 앞산에는 비안개마저 흐린 시야를  더욱 어둡게 했으며  서러운 알몸은, 흩뿌린 청강수 눈물에 점점이 녹아들고  아픔이 왔다  혼돈의 시대에 혼돈할 수 없음의 죄의 대가로  살과 뼈를 녹이는 아픔은 황홀, 그것이었다  양귀비 꽃대에 얼굴을 묻었다  꿋꿋하게  버림받은 살과 뼈가 용해되어 한 치의 공간도 차지할 수 없을 때,  확인하라,  땅속으로 스며든 내 살과 뼈가 최초의 자양분으로 버려진 씨앗을 싹 틔움을   새롭게 부여된 공간을 거느리고 메아리진 상두꾼 요령 소리에 귀 기울임을     -전문(p. 48)  ---------------------- * 『미네르바』 ..

최치원이 기술한 유교의 효충(孝忠)은···/ 고영섭

최치원이 기술한 유교의 효충孝忠은···      고영섭/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최치원이 기술한 유교의 효충孝忠은 바깥에 나갔다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집 안에 있다가 나아가서는 임금에게 충성하는(공자, 인칙효어가人則孝於家, 출칙충어국出則忠於國) 것으로 의미가 확정되었다. 이것은 부모와 임금 중심의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윤리관이다. 선진유학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쌍무적 윤리와 수평석 윤리가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하지만 한대 유학에서는 쌍무적 윤리와 수평적 윤리는 사라지고 일방적 윤리와 수직적 윤리로 바뀌었다.   유교는 인仁 사상을 역설해 왔다. '인'仁은 '인'人33)이며 '인하다는 것'人也者도 '인'仁34)이다. 이 때문에  '인'人이 '인'仁보다 선행하며 '인'仁은 '인방문화'仁方文化에서..

한 줄 노트 2024.10.22

여기의 슬픔 외 1편/ 이선이

여기의 슬픔 외 1편      이선이     주머니에 구멍이 난 줄도 모르고 구슬을 모았습니다  모으느라 분주한 마음에 감추기만 했지 열어 보지 못했습니다   내 속에 내가 많다는 말은 거짓인 줄 모르기에 사실적인 거짓입니다  나는 내 앞에 있거나 내 곁에 있거나  멀찍이 뒷짐 지고 서서 발밑을 살피고 있을 뿐  영구 외출 중인 나를 기다리는 건  어디서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색색의 마음입니다   내일을 살아내느라 나는 여기에 없고  누군가의 처진 어깨를 다독이느라 나는 여기에 없고  잃어버린 감정을 줍느라 나는 여기에 없고   나의 앞과 옆과 뒤에서 나는  여기의 실종자  오늘의 부재자  없는 세상을 잃어버린 구슬처럼 굴러다닙니다   정원 가득 꽃을 심은 정원사는 잡초를 뽑느라 꽃을 놓치듯  내 안의 ..

전입신고서/ 이선이

전입신고서      이선이     마당가  엊그제 입주한 감나무  허공만 바라고 서서  가난한 집 아기 젖 빠는 소리를 내며 꽃망울 밀어 올린다   달빛은 전입계 직원처럼 무심히 도장 찍고 가고   아이 알림장처럼 매일 열어보는 창문 위로  가지들 뻗어 줄까, 내 창은  저 꽃잎들 무슨 사연으로 받아 들까  궁금해하면   잎잎이 내려서서는  전입신고서 쓰고 가는  별빛들   참사慘事에 아이 잃고 이민 간 친구에게 죽은 아이가 여기 감꽃으로 피었다고  꽃피니 이별도 견딜 만하다고 차마 쓰지 못하고   일찍 떨어진 열매가 남기고 간  햇빛이며 달빛 받아  시퍼런 멍들 온몸으로 열매 되어 가리라고  썼다 지우는   애기 감꽃 속  흰 무덤 하나     -전문-   해설> 한 문장: 엊그제 등장한 꽃망울은 그 ..

풀벌레 외 1편/ 윤성관

풀벌레 외 1편      윤성관    풀밭에서  열쇠 벼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리 깎고 저리 다듬느라  손끝마다 굳은살이 박였을 것 같은데   맘에 드는 자물통을 열어보려고  열쇠를 갈고 닦으며  미로迷路를 헤매던 날이  내게도 있었다    -전문(p. 84)      ----------------------------------    다소 낭만적인 질문    왈츠를 추듯  발목부츠를 신고  벤츠에 오르는 여자를 보았네   문득  낙엽이 내려앉은 벤치에 앉아  그 여자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묻고 싶었네   가을하늘은 왜 슬퍼 보일까요?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흘러도  나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웃어줄 것 같은  그 여자에게 묻고 싶었네     -전문(p. 106)     ------------..

오래된 슬픔/ 윤성관

오래된 슬픔     윤성관    슬픔 하나가  풀벌레 울음소리에 실려와  명치끝을 누르고 코끝을 찌르다가  심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묵은 슬픔에 기댄다   오래된 슬픔은 철조망 너머  팬티차림으로 구타당해 늘어진 한국군 곁에 있었고  짙게 화장하고 미군의 목덜미를 기다리는  젊은 여인들과 골목을 서성거렸다  삐라를 뿌리고 구호를 외친 뒤  불을 안고 옥상에서 뛰어내린 젊은이에 대해  슬픔은 더 이상의 증언을 거부했다  살아남은 자는 늘 비겁했다 손바닥 뒤집듯 표정을 바꾸고  거짓과 위선으로 썩은 내를 숨긴 채  앞만 보고 종종걸음치는 그들이 지네 발처럼 징그러웠다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물질처럼 가짓수도 정체도 알기 어렵지만  슬픔은 고깃덩어리가 목구멍에 걸리도록 심술을 부리거나  기회의 순간에 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