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고성 외 1편/ 김은우

검지 정숙자 2024. 9. 21. 12:33

 

    고성 외 1편

 

    김은우

 

 

  정박한 배들이 어디론가 떠날 때 소용돌이치는 가파른 절벽에 다다르지 모든 사랑의 결말은 슬픔으로 끝나는 걸까 더 가야 할지 어디쯤에서 멈춰야 할지 고심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밤 변방에서의 실패한 사랑의 노래가 흘러나오지 지나온 길들은 모두 절정의 순간들 눈빛 머무르는 곳마다 눈동자가 빛을 잃어가고 모두가 돌아오는 시간에 돌아오지 않는 것도 있지 열정으로 다정을 낭비하는 같은 듯 다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너와의 관계를 싹둑싹둑 잘라내는 시간 어둠으로 가득한 기억은 고통의 이름으로만 남아 그 시간을 기록하지 기억의 윤곽을 이루는 한껏 설레게 한 시간이 지나고 거뭇거뭇 얼룩덜룩 희미해지는 날들 얼어서 아름다운 투명한 얼음꽃 둥둥 떠다니지 끝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할 때 고아처럼 버려진 것들이 숨죽여 울고 누군가 부르지 않아도 뒤돌아보게 되는 이곳에선 새 울음소리를 삼키며 눈이 내리지 약속 없이 만나는 자욱한 폭설이 폭설이 가로막는

     -전문(p.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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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은 아직 멀었다

 

    

  세상이 온통 흰빛으로 가득하다

 

  눈송이들이 모였다 흩어지며

  우리가 나눈 말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고인 말들을 간직한 채 입어 얼어버리는

  길고 어두운 동굴 같은 시간

 

  적막이 지붕을 덮고

  부연 김이 서린 창가의 화초가 얼어 죽는다

 

  풍경의 끝에서 끝으로 쏟아지는 폭설

  바람에 현수막 얼굴이 일그러지고

 

  멧돼지가 발자국을 남기고

  숲으로 사라지는 동안

 

  내가 한 일은 문을 열어놓고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는 일

 

  어떤 슬픔은 너무 무거워서 일어날 수가 없다

 

  잠시 구름을 바라봤을 뿐인데

  어디론가 흘러가는 느낌

 

  새가 울음소리를 멈췄다 다시 울 때처럼

  바람이 불다 말다를 반복한다

 

  끝나지 않는 지루한 겨울

  걸음과 걸음 사이 침묵과 침묵 사이

 

  나는 매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전문(p. 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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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만난 적은 없지만 가본 적은 있지요』에서/ 2024. 9. 15. <한국문연> 펴냄

 * 김은우1999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시집 『바람도서관』 『길달리기새의 발바닥을 씻겨주다 보았다』『귀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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