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접
장수라
끝내는 방식은 모두 슬프다
몸을 바꿀 수가 없어서
옷 속으로 들어간 그녀가 웅크리고 있다
봄비 때문이 아니었다
you're magic이라 써진 봄을 입고
횡단보도를 웃으며 뛰어가는 긴 머리 아가씨
벚꽃 한 송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다른 세계로 가고 있다
그 웃음에서 운명을 꿈꾸었던 시간을 보았다
삶의 변수가 올 줄 아직 모르는 나이
변수를 예감할 때 누구나
조금씩 시접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여분의 천 조각을 내어 수선해 보아도
겨드랑이 옆구리 사타구니 우리 몸 구석구석
곡선의 결을 따라 다른 온도로 숨어 있는 마음들
변수를 둔 상태는 불투명하다
시접을 모두 써 버려 감당할 여백이 없을 땐
자신을 통째 버리거나 품을 떠나보낸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은 버려질 뿐이다
나를 통째 던져 버리는 날은
사람에 대한 온도가 잠시 멈출 때
시접은 온전히 시접으로서 태도를 보인다
몸을 구겨질 대로 구겨 공그르기 박음질을 한다
부서져 사라지는 그 이름도 시접 속으로 접어 감춘다
안쪽으로 접어 둔 채 영영 꺼내 보지 않거나
어제를 조용히 정리하는 날엔
시접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찬바람 같은 이름
먼 산자락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처럼
몸은 멀고도 멀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인이 이루고자 하는 존재의 형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몸에 꼭 맞는 옷처럼 마음을 알맞은 크기로 재단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 속에서 위 작품은 창작된 것처럼 보인다. 제목인 "시접"이란 옷을 만들 때 원단에 여유를 둔 부분이다. 시접은 옷의 크기를 늘리거나 줄일 때 활용되는데, 이 작품에서 이러한 시접은 마음을 '수선하는' 비유로 활용된다. 어떤 마음을 드러내고 어떤 마음은 감추면서 사람은 마음을 다루는 법을 익힌다. "삶의 변수가 올 줄 아직 모르는 나이"에는 마음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마음의 여력을 남겨야 하는 이유를 안다. 때론 "시접을 모두 써 버려" 여력조차 갖추지 못할 것을 안다.
결국 시인이 이루고자 하는 존재는 관계론적 평온이라고 할 수 있다. 관계에 자신을 내던지거나 사람에게 체념하는 경험 속에서 시인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이름은 간직하면서도 "어제를 조용히 정리하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것이 쉽지 않다고 느끼기에 "먼 산자락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처럼/ 몸은 멀고도 멀다"라고 이 작품은 끝맺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수라 시인에게 예술은 길을 잃지 않게 하는 부표이자 마음을 다잡는 위로일 것이다. (p. 시 96-97/ 론 130-131) <박동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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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 당신이 찰랑거리고』에서/ 2024. 9. 10. <파란> 펴냄
* 장수라/ 1968년 전남 고흥 출생, 2010년『시와 문화』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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