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시접/ 장수라

검지 정숙자 2024. 9. 20. 01:54

 

    시접

 

     장수라

 

 

  끝내는 방식은 모두 슬프다

  몸을 바꿀 수가 없어서

  옷 속으로 들어간 그녀가 웅크리고 있다

 

  봄비 때문이 아니었다

  you're magic이라 써진 봄을 입고

  횡단보도를 웃으며 뛰어가는 긴 머리 아가씨

  벚꽃 한 송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다른 세계로 가고 있다

 

  그 웃음에서 운명을 꿈꾸었던 시간을 보았다

  삶의 변수가 올 줄 아직 모르는 나이

  변수를 예감할 때 누구나 

  조금씩 시접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여분의 천 조각을 내어 수선해 보아도

  겨드랑이 옆구리 사타구니 우리 몸 구석구석

  곡선의 결을 따라 다른 온도로 숨어 있는 마음들

  변수를 둔 상태는 불투명하다

 

  시접을 모두 써 버려 감당할 여백이 없을 땐

  자신을 통째 버리거나 품을 떠나보낸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은 버려질 뿐이다

  나를 통째 던져 버리는 날은

  사람에 대한 온도가 잠시 멈출 때

  시접은 온전히 시접으로서 태도를 보인다

 

  몸을 구겨질 대로 구겨 공그르기 박음질을 한다

  부서져 사라지는 그 이름도 시접 속으로 접어 감춘다

  안쪽으로 접어 둔 채 영영 꺼내 보지 않거나

  어제를 조용히 정리하는 날엔

  시접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찬바람 같은 이름

  먼 산자락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처럼

  몸은 멀고도 멀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인이 이루고자 하는 존재의 형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몸에 꼭 맞는 옷처럼 마음을 알맞은 크기로 재단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 속에서 위 작품은 창작된 것처럼 보인다. 제목인 "시접"이란 옷을 만들 때 원단에 여유를 둔 부분이다. 시접은 옷의 크기를 늘리거나 줄일 때 활용되는데, 이 작품에서 이러한 시접은 마음을 '수선하는' 비유로 활용된다. 어떤 마음을 드러내고 어떤 마음은 감추면서 사람은 마음을 다루는 법을 익힌다. "삶의 변수가 올 줄 아직 모르는 나이"에는 마음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마음의 여력을 남겨야 하는 이유를 안다. 때론 "시접을 모두 써 버려" 여력조차 갖추지 못할 것을 안다.

  결국 시인이 이루고자 하는 존재는 관계론적 평온이라고 할 수 있다. 관계에 자신을 내던지거나 사람에게 체념하는 경험 속에서 시인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이름은 간직하면서도 "어제를 조용히 정리하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것이 쉽지 않다고 느끼기에 "먼 산자락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처럼/ 몸은 멀고도 멀다"라고 이 작품은 끝맺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수라 시인에게 예술은 길을 잃지 않게 하는 부표이자 마음을 다잡는 위로일 것이다. (p. 시 96-97/ 론 130-131) <박동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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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시집 당신이 찰랑거리고』에서/ 2024. 9. 10. <파란> 펴냄

  * 장수라/ 1968년 전남 고흥 출생, 2010년『시와 문화』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