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허구의 힘 외 1편/ 장수라

검지 정숙자 2024. 9. 20. 02:18

 

    허구의 힘 외 1편

 

    장수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어요

 

  대자연을 마주하면 외르르 무너지는 것들

 

  너무 버티고 살았구나

 

  많이 답답했구나

 

  너무 억누르고 살았구나

 

  무슨 말인지도 알겠고 어떤 마음인지도 알겠어요

 

  석양을 가슴에 담으며 내 목소리를 내가

 

  자신 있게 귀담아들어야 한다는 걸

 

  현재 자신과 어긋난 시간의 흔적을

 

  허구인 줄 알면서도 죽어라 믿는 힘

 

  그것이 절망을 준다면

 

  또 다른 환상을 만들 수 있는 힘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허구라는 것을

 

  믿고 또 믿는 것

    -전문(p. 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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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유

 

 

  하루 종일 나비 한 마리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인사동 어느 전시관에서 나비 그림을 보고

  홍보용 엽서 한 장 손에 쥐고 나온 것뿐인데

 

  머리 위에 앉았다가 어깨 위로 마침내 손등에

  나비는 멀고 가까워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잡으려 손을 뻗으면 멀리 달아나는 나비 한 마리

 

  내 곁에 오게 하기 위해 손짓도 눈길도 주지 않고

  숨죽이던 순간이 있었다

 

  나비를 향한 사랑은 내 맘에 따라 귀찮은 모기가 되었다가 산비둘기나 부엉이가 되기도 했다

 

  다른 것에 몰두하고 있을 땐

  그 나비는 죽은 나비가 되는 것이다

 

  종이 한 장 속 나비를 사랑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라볼 때만 나비는 살아 있다

  너와 나 사이 팔랑팔랑 일렁이던,

 

  미미한 바람을 일으켜 주던 날갯짓은

  태양이 배회하던 오후의 보호색

 

  미래를 얼리고 달아나는 한 잎 두 잎 바람들

  저기 흙내음 나는 언덕 위에 앉아 보라고

 

  여름 태양 빛 아래

  한 송이 꽃이 어깨에 스며들었다

 

  멀리서 태양이 걸어 들어오고

  당신이 찰랑거리고 또 찰랑거리고

     -전문(p.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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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당신이 찰랑거리고』에서/ 2024. 9. 10. <파란> 펴냄

  * 장수라/ 1968년 전남 고흥 출생, 2010년『시와 문화』로 등단